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28)화 (28/90)

<28화>

“제가 마탑에서 개발한 연출 장비와 촬영 장비를 빌려드리고 있는 건 아실 겁니다.”

“네…… 다른 극단 사람들은 쓰고 있었다지요. 우리 극단은 아니지만.”

어조가 부드럽지는 않았다.

음, 우리에게 앙심이 있을 수도 있지.

관점에 따라서는 검은 달 사업과 그 장비 때문에 극단이 해체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

뭐, 내가 사업을 시작한 게 폴리우스 때문이니 다 그놈 잘못이지만.

“그냥 무대 위에서 배경을 연출하지 말고…… 진짜 절벽에서, 진짜 노을 아래서, 진짜 폭포에서 찍는 건 어떻습니까?”

“!”

“칠렌 연출가. 무대에 올리지 않을 건데, 꼭 극장을 고집할 필요 있을까요?”

칠렌 연출가가 다미안 마탑주의 말에 멍해 있는 걸 본 나는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물론, 연극과 영화의 연출은 많이 다르겠지요. 하지만 전혀 문외한인 사람들보다는 연극에서 정점을 찍어 보신 분이 나을 거라 생각해서 온 건데……”

나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연극을 비하하는 건 절대로 아니에요. 하지만 가끔, 무대가 아니라 실제 장소에서 찍고 싶다는 생각 안 해 보셨어요?”

“……그야 물론 해 봤습니다.”

나는 방긋 웃었다.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겠어요.”

지금 검은 달의 다른 연출가도 촬영 장비 등을 굉장히 잘 다뤄 주고 있지만 그래도 예술적인 감각이나 연출 기술은 부족한 게 사실이다.

내가 원하는 영화적인 연출은 이 사람들이 더 잘할 것 같거든.

“……최고의 대우라면.”

“돈이면 돈, 그리고……”

나는 결정적인 기회를 다미안에게 주고 싶었다.

이미 알아 버렸거든, 벨데르트 극단은 그에게 꽤 특별하다는 걸.

‘자, 결정적인 말을 해 보라고요. 마탑주님.’

나는 말을 다 잇지 않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시선을 받은 다미안 마탑주가 이어 말했다.

“마탑에서 만든 장비들, 몇몇 개는 칠렌 연출가, 그리고 당신과 함께 일하는 사람에게만 독점으로 공급하겠습니다.”

칠렌 연출가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래, 다른 극단에서 내가 빌려주도록 한 장비를 보며 얼마나 부러웠을까.

“비가 오지 않는 맑은 날에 비가 오도록 해 드릴 수 있습니다. 불이 필요한 장면에서 안전하게 불을 쓸 수도 있겠지요.”

“……!”

“벼락이 정말로 내리치는 하늘, 정말로 손에서 마법이 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제가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정말 가능하단 말입니까?”

“제가 예시를 든 것 이외에, 더 원하는 효과가 있다면 마탑에서 개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동화책에서나 나오는 일들, 실제로 찍을 수 있는 겁니까? 하늘을 난다거나.”

“물론입니다.”

나는 옆에서 느긋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흐음, 촬영을 하늘에서 해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장면도 찍을 수 있겠네요. 전쟁 신에서 대군이 몰려오는 장면 같은 건 그 앵글이 더 위압감 있지 않겠어요? 수가 더 잘 보일 테니까.”

처음에는 단호하게 연극에 관한 이야기는 듣기 싫다고 해 놓고. 칠렌 연출가는 벌어지는 입을 겨우 손으로 막았다.

‘한창 머릿속이 복잡하겠네.’

내 말을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겠지. 연극 연출과는 정말 다른 느낌의 연출이 될 거라는 거.

칠렌 연출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유혹이군요. 제가 이런 기회를 놓칠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제가 단순히 예전에 벨데르트 극단에서 다미안 도련님을 자주 뵈었다는 이유로 영입된 거라면……”

아니, 누가 다미안 마탑주하고 알던 사이 아니랄까 봐. 어쩜 둘이 똑같은 말을 하고 있냐.

나는 자신감 없어 보이는 칠렌 연출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미안 마탑주야 그렇다 치고. 내 아빠뻘인 아저씨까지 어르고 달래야 할 줄은 몰랐네.

하지만 이것도 내가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해내야겠지.

“칠렌 연출가님.”

나는 오늘 중 가장 낮게 깐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대표님. 저는……”

“자신 없어요? 본인이 다미안 마탑주님하고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만 영입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간, 칠렌 연출가의 눈에 빛이 번뜩였다.

나는 고개를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그럴 거면 지금 관두세요. 저는 <13번째 기사>보다 더 훌륭한 영상물을 만들 능력 있는 연출가가 필요하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축 처진 사람은 필요 없으니까.”

“절대 아닙니다.”

칠렌 연출가가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는 나와 다미안 마탑주를 자신감 있는 얼굴로 마주 보았다.

“오늘 저를 찾아 주신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칠렌 연출가는 더 이상 호숫가에 멍하니 앉아 흉내뿐인 낚시를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의 온몸에서는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예전, 호랑이 연출가라고 불리던 그 시절처럼.

* * *

‘이야, 회의실 한번 잘 써먹네.’

나는 마탑의 가장 좋은 회의실에 빼곡하게 모인 사람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극단을 실질적으로 이끌던 연출가인 칠렌을 설득하자, 다른 제작진도 쉽게 모을 수 있었다.

벨데르트 극단에서 엄청 생각하는 척하며 주던 유예 기간을 뿌리치고, 나와 일하겠다고 다들 나와 버렸거든.

그러자 벨데르트 가문의 사람이 보인 반응은……

“나가서 일자리나 구할 수 있겠느냐. 기껏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지 않도록 신경 써 줬더니 은혜를 모른다…… 그런 식으로 말하더군요.”

당사자가 아닌 내가 더 화가 난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길게는 수십 년을 일한 사람도 있는데, 자신의 가문 이름을 단 극단을 이런 식으로 취급하다니.

정말 끝까지 예의가 없군.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내야 위로가 될까?’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밝았다.

자신이 험한 취급을 당했다는 경험을 안 지 얼마 안 된 내 앞에서 할 정도로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저희는 그들이 후회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걸 만들 테니까 괜찮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위로의 말 같은 건 필요 없었다.

내 앞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상처를 딛고 일어나 있었다.

“당연하죠,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대단한 걸 만들도록 저희도 도와드릴게요!”

그래서 나는 그냥 쾌활하게 웃었다. 그러자 그들은 더 환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저희들은 ‘벨데르트 극단’이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겠네요?”

“대표님, 저희는 이제 ‘검은 달 극단’이지요?”

그리고 오히려 도화선이 된 듯이 열정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건, 제가 연극을 해 왔다고 한들 전혀 다른 분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맞아요. 연극처럼 한 무대에서 오랫동안 연기하면 위화감이 느껴질 수도 있어요. 배우들의 얼굴이 더 자세하게 나오니까 연기 또한 다르게 지시해야 할 거고.”

“연극하고는 또 달라. 굉장히 어려워. 머리가 빠질 지경이야. 하지만 재미있는걸. 생전에 내가 이런 영상을 만들게 될 줄이야.”

“오히려, 그 사생아 놈이 우리를 해고해 준 게 고마울 지경이지 않나?”

그걸로 끝이었다.

최고 수준의 연봉, 뛰어난 복지, 예술혼을 불타오르게 하는 마법 촬영 장비들.

벨데르트 극단에서 일하던 최고급 제작진들은 나와 계약을 마쳤다.

* * *

다시 모인 벨데르트 극단 사람들은 활발하게 움직였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평소 다미안은 소위 말하는 활기 넘치는 분위기 따위를 싫어했다.

사람이 많은 곳을 꺼렸고, 큰 소리 같은 건 귀에 거슬렸다.

한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시끌벅적한 극단 사람들을 보니 오히려 잔잔한 미소가 일었다.

어린 시절, 다미안이 극단의 연극을 보며 어렴풋하게 했던 상상.

벨데르트 가문의 후계자가 되면, 그리고 극단을 운영하게 된다면……

잠시 생각에 잠겼던 다미안을 부르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다미안 도련, 아니, 마탑주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미안은 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척했으나, 사실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이런 날이 온 건 전부……’

다른 사람과 활발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멜라니 덕분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접점 없는 공작 영애, 몇 년 후에는 폴리우스의 약혼녀, 클로틸드 영애, 클로틸드 대표……

‘멜라니 클로틸드.’

살짝 곱슬거리며 허리까지 내려오는 연보라색 머리카락. 그보다 좀 더 진한 빛으로 보석처럼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

예쁜 얼굴에, 흔치 않은 색을 몸에 지닌지라 눈에 띄는 건 사실이었지만. 지금처럼 사람들을 끄는 건 다른 매력 때문이다.

화려한 이목구비에 어울리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

야무진 목소리를 들으면 누구든 그녀의 뒤를 따르고 싶어질 테니까.

“마탑주님, 저랑 약혼하시죠.”

“이왕이면 저를 좀 더 알아 가는 건 어때요?”

“우선 저와 무도회에 참석하고 결정하시는 건 어떠세요?”

다미안 역시 멜라니의 제의를 받아들인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만…… 늘 영리한 듯 보이는 그녀는 치명적인 역린이 있었다.

너무나도 커서, 오히려 때때로 잊게 되는.

멜라니 클로틸드는 몸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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