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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33)화 (33/90)

<33화>

폴리우스는 처음에 당황해서 클라라에게 되물었다. 전혀 해 보지 않은 생각이었으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클로틸드 영애가 극단 사람들을 고용할 이유가 뭐겠어요? 다들 <13번째 기사>는 배우가 몇 번이나 거절해서 영상석으로 만들어지지 못할 거라고 그랬잖아요.”

“…….”

“폴리우스를 방해하려고 그랬다기엔 이상하지 않아요? 차라리 폴리우스가 욕먹을까 봐 배려했다면 모를까.”

벨데르트 백작가는 오랫동안 극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자신이 독단적으로 극단 직원들을 해고하며 극장 건물까지 팔아 치우려 한 건 갑작스럽게 보일 수 있었다.

역시 사생아라 예술은 모른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아버지는 같은데 어머니가 누구냐로 사람들은 그를 쉽게 비난했으니까.

슬픈 운명을 타고났으니까.

하지만 영상석 출범 이후 벨데르트 극단은 하락세를 겪었다. 적자가 빠른 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해체를 감행했다.

앞으로도 이익이 날 여지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다미안이 멜라니를 꼬드겨 영상석 사업만 하지 않았더라도, 일자리를 그들이 잃게 되지는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다지만 폴리우스도 마음이 쓰이는 일이었다.

그런데 극장 건물도 아니고, 그 인력들을 멜라니가 데려가다니?

많은 사람이 <13번째 기사>를 두고 떠들어 대는 상황 속에서.

잔뜩 자신감이 붙은 폴리우스는 흐린 판단력으로 생각했다.

‘클라라의 말이 맞아. 내가 극단을 해체시켰는데, 멜라니가 그 뒷수습을 할 필요가 있나? 정말 멜라니가 날 배려한 게 아니면 뭐야?’

연극은 그냥 녹화만 하면 되는데, 굳이 벨데르트 극단 직원들을 데려가서 직원을 더 고용할 이유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욕먹지 않도록, 한순간에 직원들을 내친 걸 멜라니가 보듬어 준 것으로밖에는 해석이 안 됐다.

물론 멜라니는 그 인력들의 가치를 알아보고 한 행동이었고, 일부러 폴리우스가 착각하도록 클라라를 보낸 것이지만 말이다.

‘그래, 멜라니가 나를 얼마나 좋아했는데. 이제 슬슬 다미안이 겉모습만 번드르르하다는 걸 알 때도 되지 않았나?’

멜라니가 보인 모습은 아직도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폴리우스는 저도 모르게 위로 씰룩이려는 입꼬리를 내리눌렀다.

그리고 하루 종일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어머니인 밀라 부인에게로 향했다.

“어머니, 조세핀이 좋으세요? 아니면 멜라니가 좋으세요?”

그는 이미 멜라니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에 빠진 후였다.

“뭐, 두 사람 중에 며느리로 누가 좋은지 한번 골라 보세요.”

그리고 헤어진 전 약혼자와 아직 약혼이 확정되지 않은 여자를 두고 하는 말에, 밀라 부인 역시 여상하게 대답했다.

“뭐…… 조세핀도 나쁘지는 않다만. 멜라니가 좀 더 말을 잘 듣긴 했었지. 요즘에야 좀 사근사근하게 변하긴 했다만은, 조세핀이 사실 남의 말 고분고분하게 듣는 애니? 조금만 뭐라 하면 앙탈을 얼마나……”

두 사람은 멜라니를 원하면 언제든지 데려올 수 있다는 양 말했다.

“뭐, 거기에 조세핀은 후작 영애기도 하고. 멜라니는 공작 영애잖니. 잉그다보다는 클로틸트라는 걸 사람들은 다 알 거다.”

“흐음.”

“멜라니가 요즘 달라졌기는 하다만은, 널 워낙 좋아했다 보니 완전히 돌아섰을 것 같지는 않다.”

폴리우스는 클라라에 이어 밀라 부인에게도 비슷한 말을 들으니 신경이 쓰였다.

‘사실 내가 영상석 사업을 하게 되면 멜라니를 이길 게 뻔한데…… 다미안이야 뭐 콧대를 한번 눌러 주고 싶었다지만, 멜라니는 안타깝지.’

그의 기억 속에서 멜라니는 항상 아프다는 이유로 몸부림치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찾는 여자애였다.

가녀리고, 안타깝고, 하지만 때로는 너무 매달려서 답답한.

폴리우스는 멜라니에게 한번 기회를 줘 보기로 했다.

제 사업은 성공할 테니 자신과 동종업계에서 일하게 되는 멜라니에겐 안타까운 일이니까.

‘흐음, 그러고 보면 멜라니가 요즘 벨데르트 극단 사람들과 만난다고 했었지?’

폴리우스는 클라라가 한 말을 떠올리며 그녀가 있을 극장 거리로 향했다.

그는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떼우다가, 벨데르트 극단 사람들과 걷고 있는 멜라니가 보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보니 확신이 들었다. 멜라니가 자신을 정말 좋아하긴 하는 모양이었다.

“흠, 크음.”

폴리우스는 최대한 사람이 적게 있을 때를 노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멜라니, 오랜만이야.”

“……별로 인사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러나 잠시 놀랐을 뿐, 멜라니는 자신을 보고 바로 지나치려 했다.

폴리우스는 내려가려는 입꼬리를 다시 올리며 멜라니의 앞을 막았다.

“우리 둘만 조용히 얘기하는 게 낫지 않겠어? 물론, 다른 사람들이 있어도 괜찮다면 나는 상관없긴 한데.”

그러자 멜라니는 한숨을 내쉬더니 다른 사람들에게 잠시 대화하고 오겠다고 말했다.

폴리우스는 여유롭게 그녀의 뒤를 따라 사람들로부터 몇 미터 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직도 사람이 많……”

폴리우스는 좀 더 먼 곳으로 가자고 할까 하다가, 이내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보는 앞에서 멜라니가 다미안을 버리고 저에게 오겠다고 하면, 그게 더 재밌지 않은가?

폴리우스가 하려던 말을 흐리자, 멜라니는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죠? 구질구질하게 매달릴 거라면 관둬요.”

“구질구질하다니, 우리 사이에. 너무하네.”

“저랑 당신을 ‘우리’라고 하지 마세요.”

정 없는 말투. 하지만 폴리우스는 멜라니가 자존심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다고 생각했다.

‘벨데르트 극단 사람들은 다 데려가 놓고. 이런 말 해 봤자 귀엽기만 하다고.’

그래, 그동안 멜라니에게 자신이 다소 무심하긴 했었다.

사랑이 깊었던 만큼 원망하는 마음도 크겠지.

“멜라니. 내가 영상석 사업을 시작하게 될 것 같거든?”

폴리우스는 멜라니의 큰 반응을 기대하며 평온한 척 말했다.

“네 생각은 어때?”

그러나 멜라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대답했다.

“제게 뒤치다꺼리를 해 달라고 온 거면 거절할게요.”

“뭐?”

폴리우스는 당황하여 다시 한번 되물었다.

“내가 영상석 사업을 한다는데 왜 돌아오는 말이 그거야?”

“무슨 반응을 원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아니, 이게 너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 아니잖아? 네가 하는 업계에 내가 뛰어드는 거라는 거니까?”

폴리우스의 점점 달아오르는 목소리를 들으며 멜라니는 피식 웃었다.

“네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잘 안 되나 본데…… 너랑 내가 제대로 경쟁이 될 거라고 생각해? 네가 연극에 대해 얼마나 알아?”

그 모습을 본 폴리우스는 돌연 정색하고는 말했다.

“내가 벨데르트 가문에서 극단을 몇 년이나 운영했다고 생각해? 기껏해야 연극이나 몇 번 본 게 다인 너랑은 차원이 달라.”

“그래서요?”

“하지만 연극을 영상석에 담는 건 잘했어. 그 점은 칭찬해 줄게. 사업 아이템 하나는 잘 골랐다는 거야.”

폴리우스는 여유로운 척 표정을 가다듬고는 예전처럼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맨 처음, 멜라니가 좋아하던 얼굴로.

“나랑 사업 같이하고 싶지 않아? 솔직히 다미안은 이제 질릴 때가 됐잖아.”

“그게 용건이었군요.”

“네가 나에게 검은 달의 대표로 와 달라고 부탁하면 내가 괜히 사업체를 또 하나 만들 필요는 없을 거야.”

폴리우스는 말을 마칠 즈음에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여유를 되찾았다.

“뭐, 나랑 다시 약혼하면 <13번째 기사>도, 내가 같이 들고 가 줄게.”

그는 멜라니가 자신의 말을 절대 거절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며 앙칼지게 구는 멜라니가 조금은 귀엽다고 생각했다.

‘괜히 서로 경쟁한다고 제 살만 깎아 먹을 거고. 독점으로 가는 게 낫다는 걸 모를 정도로 멜라니가 바보는 아니잖아?’

아직은 붉은 해도 초기 단계다.

만약 검은 달의 대표가 된다고 하면, 그만둔다고 해도 이익이었다.

그러나 잠시 폴리우스를 지그시 보던 멜라니는 금방 승낙의 말을 내뱉지 않았다.

“하지만 그 벨데르트 가문에서 자란 건 다미안 마탑주님도 마찬가지인데요.”

“하…… 그 자식하고 나를 비교해? 그놈은 마법밖에 모르는 멍청이야. 그 자식한테 감성이 있을까?”

폴리우스는 멜라니가 자신에게 질문을 하는 걸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했다.

“무슨 자신감이에요? 당신이 영상석 사업을 할 감각은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아니었다.

“경력도 없으면서…… 나랑 똑같이 대표를 시켜 달라고 하다니. 공동 대표인 다미안 마탑주님은 사업적인 감각과 더불어 영상석의 기술을 담당하는 중요한 사람인데.”

“뭐라고?”

“솔직히 혼외 자식이라 백작저 바깥으로 나돈 시간이 긴 당신보다, 다미안 마탑주님이 더 어릴 적부터 연극을 자주 접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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