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35)화 (35/90)

<35화>

마탑과 영상석 사업을 한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유리 꽃처럼 소중하게 대해 온 딸아이가 구체적인 목표와 숫자가 적힌 보고서를 만들어 사업을 이끌고 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또 생각했으면……’

클로틸드 공작은 빼곡한 글자 안에서 사업만이 아니라, 멜라니의 꿈을 본 것 같았다.

“죄송해요…… 같이 극장에 가기로 했는데. 제가 오늘 몸이 좋지 않아서.”

공작은 문득 예전 일이 떠올랐다.

멜라니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연극의 공연이 있던 날.

폴리우스가 일이 있어 요정의 축복을 받지 못한 멜라니는 아침에 쓰러지고 말았다.

진통제의 부작용 때문에 덜덜 떨리는 다리, 해쓱하게 질린 얼굴.

“약속을, 어겨서 죄송해요.”

제 잘못도 아닌데 사과를 건네던 멜라니.

힘든 일이 일어나도 연극을 보면 잠시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게 되어 좋다던 제 딸은 그 뒤로 연극을 같이 보러 가자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작님…… 멜라니 아가씨께서 고리대금업자에게 상단을 담보로 빌렸던 돈을 안전한 은행 대출로 변경했다고 합니다.”

클로틸드 공작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그리고 다음 날, 초대한 손님들이 공작저에 방문했다.

귀족 간의 약속치고는 굉장히 타이트한 방문이었지만, 그들이 워낙 영상석에 열성적인 호기심을 가지고 있어 기꺼이 수락한 것이다.

“기존 영상석도 대단했는데, 이 정도 크기라니! 화질도 음질도 월등하군요!”

“과연, 이 크기라면 여럿이서도 함께 볼 수 있겠군요. 홈시어터라고 하셨습니까?”

영상석을 보기 전부터 그들은 호들갑을 떨더니, 본격적으로 홈시어터를 작동하자 아주 넋이 나갔다.

“작은 영상석도 그것 나름의 맛이 있지만, 이건 아주…… 청각과 시각을 제대로 만족시켜 주는군요……”

여운이 굉장한 듯했다.

확실히 클로틸드 공작도 동감하는 바였다.

작은 영상석에서는 이런 느낌을 받지 못할 것 같았다.

“집에 이런 게 있다니. 하아. 클로틸드 공작님이 미치도록 부럽습니다……”

“따님을 잘 두셨네요. 클로틸드 영애를 내가 낳았어야 했…… 죄송합니다. 실언이었습니다.”

평소 자존심을 내세우던 귀족들까지 부럽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예술을 좋아하기로 유명한 귀족은 클로틸드 공작에게 체면치레도 하지 않고 말했다.

“클로틸드 영애께서는 혹시 이 홈시어터를 안 파신답니까? 가격은 얼마라도 좋습니다. 꼭 사겠습니다.”

“아니, 먼저 공작저에 가 봐도 되겠느냐고 물은 건 저란 말입니다!”

기품을 중요시하는 귀족들 간에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작저에 초대되어 감상 기회를 얻어 놓고 이게 무슨 무례십니까!”

그래도 제정신인 귀족이 하나 있긴 했다.

“클로틸드 공작님이 다시 초대해 주지 않으시면 어쩌려고요!”

……아니, 다른 쪽으로 정신이 팔린 건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들은 바로 대화를 멈췄다. 그리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죄송합니다, 클로틸드 공작님.”

“따님께서 워낙 훌륭한 물건을 만드셨다 보니……”

자신의 앞에서 고성이 오갔다니, 기분이 좋지 않아야 할 일이지만.

지금 이 상황은 모든 게 멜라니가 만든 물건 때문이었다.

그것도, 너무 잘 만들어서 말이다!

“크흠…… 뭐, 내가 이 건에 대해서는 나중에 딸아이에게 물어보겠소.”

따님은 언제 들어오시나요? 대답은 언제쯤 들을 수 있을까요?

온갖 질문이 꾹 차오르는 얼굴들이었으나 방금의 무례를 생각하는 듯 애써 삭히는 게 보였다.

클로틸드 공작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멜라니로 인해서 이런 기분을 느낄 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저 사랑스러운 딸이었는데……

딸이 주위에 인정받는 기분은 아버지로서 무척 좋은 일이었다.

확실히 멜라니는, 대단한 걸 만들어 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었다.

상단을 담보로 대출을 받은 것은 분명 큰 잘못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클로틸드 공작은 손님들이 돌아간 것을 확인하자 당장 집사를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공작님.”

“집사, 멜라니가 이끌고 있는 검은 달에 대해 최대한 많은 것을 알아 오게. 떠도는 소문이나, 평판 같은 것.”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멜라니가 진통제를 얼마나 먹는지까지 보고하고.”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 준다는 빌미로, 여태까지 너무 멜라니에게 무관심했다.

어쩌면, 멜라니에게는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긍정보다는 여러 가지 조언이 필요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 * *

폴리우스가 멜라니를 찾아가 검은 달의 공동 대표직을 달라고 제의한 것도 모르고, 영상석 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정한 조세핀은 심란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홈시어터니 뭐니. 왜 생각지도 못한 게 계속 튀어나오는 거야?’

영상석 사업에 뛰어들기로 한 것까지는 좋았다. 영상석 사업이 유망하다는 것도 잘 알겠다.

‘그런데 검은 달의 성장세가 너무 가파르다.’

인정하지 않으려 해도 이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사실 처음에 영상석 서비스가 좋다고 떠드는 건 유행에 민감한 젊은 사람들이 주였는데, 클로틸드 공작이 공작저에 지긋한 귀족들을 데려간 이후로 또 분위기가 바뀌었다.

젊은 사람들이 떠들던 게 1차 유행이라면, 이제는 2차 유행이랄까.

아니, 오히려 지긋한 귀족들은 이걸 유행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듯했다.

아무래도 젊을 때보다 외출을 자주 하지 않는 그들은, 적적한 시간에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이 생겼다며 좋아하는 듯했으니까.

‘어쩌면 젊은 사람보다 충성도가 높을지도 몰라. 이제 검은 달에 충성스러운 고객층이 생겼어.’

처음에는 어린 사람들 유행이 아닌가 경원시하던 사람들까지 사로잡은 거다.

게다가 예술 쪽에서 권위가 있는 자들까지 칭송을 해 대니, 영상석에는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까지 교양 있어 보이려고 홈시어터인지 뭔지를 사겠다고 난리……

‘아니,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 없어. 우선 영상석 사업을 널리 퍼뜨리는 건 검은 달이 하고, 훨씬 더 좋은 품질의 영상석으로 시장을 차지하는 건 나와 폴리우스가 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차라리 이것도 기회다 싶었다.

하지만 영상석 사업에 대한 관심을 기존의 검은 달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업으로 빼앗아 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영상석을 만드는 마법사를 알아보고는 있지만, 쉽게 구해지지가 않는 상황이야. 만약 구해진다고 해도 마탑보다는 못할 거야.’

조세핀은 그래서 콘텐츠로 검은 달과 차별화를 두려고 했다.

귀족들은 자신이 교양 있는 것을 뽐내고 싶어 하고 남들과는 다른 것을 선망한다.

솔직히 기존에 멜라니나 다미안이 교양 있는 이미지는 아니었지 않은가.

그러니 사교계의 꽃이라는 자신의 이점을 잘 살려서, 콘텐츠가 고급스럽다는 것에 방점을 두려 했었다.

한데.

‘검은 달이 그냥 영상석 구독이 아니라 홈시어터로 프리미엄 라인까지 먹는다고? 그건 곤란하지.’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아무래도 홈시어터까지 따라 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위기가 클로틸드 쪽으로 완전히 기우는 건 막아야 한다.

이대로 분위기가 흘러간다면, 분명 조세핀은 멜라니에게 밀리는 이미지가 되어 버린다.

영원히 이인자로 남는다는 말이다.

‘내가 교양으로 멜라니 클로틸드를 짓밟는 모습을 보여 줘야 돼. 그래야 그 이미지가 영상석 사업에까지 이어질 거야.’

멜라니와 다미안이 뛰어난 영상석 기술을 가졌다면, 조세핀과 폴리우스의 영상석 사업은 훌륭하고 고급스러운 콘텐츠를 골랐다고 말이다.

마침, 조세핀은 멜라니를 곧 볼 날이 있었다.

멜라니는 원래도 아프다는 핑계로 연회 같은 곳은 거의 나가지 않다시피 하고.

다미안 마탑주에 관한 질문을 받는 게 무서운지, 건국제 이후 그렇지 않아도 잘 나오지 않던 사교 모임에서 더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멜라니, 거기에 더불어 클로틸드 공작이 참석하는 모임이 하나 있다.

모든 귀족들이 존경하는, 라닐다 백작.

그러나 아카데미에서 교수직을 역임했던 그는 교수라고 불리는 일이 잦았다.

그가 가르친 인물들 중에는 클로틸드 공작과 클로틸드 공작 부인, 그리고 잉그다 후작도 있었다.

유명인들의 은사.

클로틸드 공작이 지도 교수였던 그를 각별히 생각하는 건 유명했다.

몸이 좋지 않아 사교 모임에 잘 참석하지 않는 제 딸도 그때만큼은 꼭 데려가 항상 인사를 시킨다는 것까지도.

‘그때가 기회야. 꼴 보기 싫은 건 클로틸드 공작도 마찬가지니, 그 부녀를 같이 짓밟아 버리는 거야.’

그리고 조세핀의 영상석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잉그다 후작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는 사교 모임에 참석하기 전, 딸인 조세핀을 불러 미소를 지었다.

“조세핀. 이럴 때는 네가 사교계의 꽃인 게 자랑스럽기 그지없구나.”

잉그다 후작은 역시 조세핀을 키워 낸 사람다웠다.

“클로틸드 공작 놈의 얼굴을 구겨지게 만들어 줄 수 있겠어.”

두 사람은 사교 모임에 참석했을 때, 분위기를 어떻게 잡을지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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