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36)화 (36/90)

<36화>

* * *

라닐다 백작이 연 모임은 검소했다.

휘황찬란하게 꾸미고, 자신을 과시하려는 뭇 귀족들답지 않았다.

요즘 유행하는 화려한 티 푸드, 보석을 알알이 박아 놓은 은식기, 층고가 높고 질 좋은 카펫이 깔려 있는 홀.

그 무엇도 없었으나, 누구도 오늘의 모임을 비웃지 못했다.

소박하다고 할 수 있는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같이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거물들에게, 조세핀은 일일이 찾아가 어여쁘게 웃었다.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저번에 다치셨던 팔은 괜찮으세요?”

“아드님이 결혼하셨다고 하던데, 제가 그날은 참석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에……”

조세핀은 그 거물들의 일상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다.

대하기 어려운 아버지뻘의 귀족들에게도 살갑게 먼저 다가갔다.

다소 경직되어 있던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건 모두 조세핀이었다.

그들은 미혼 영애인 조세핀이 살뜰하게 안부를 챙기는 것을 보며 허허 웃었다.

“잉그다 후작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겠습니다. 이렇게 귀엽고 야무진 딸이 있다니요. 아들만 있는데, 이런 걸 보면 딸을 낳았어야 하구나 싶군요.”

“맞습니다. 솔직히 아들이 뭐가 쓸모 있습니까. 허허.”

“잉그다 영애는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던데, 왜 그런 말이 나온 건지 알겠습니다.”

잉그다 후작은 그 모습을 보며 배부른 얼굴을 했다.

‘우리 가문이나 클로틸드 가문이나 똑같이 딸이 하나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적나라하게 비교가 가능하지.’

조세핀은 귀족들이 건네는 칭찬에 꽃봉오리처럼 맑게 웃었다.

“과찬이세요. 아직 미숙한 점이 많은걸요. 하지만 가르침을 주신다면 감사히 듣겠습니다.”

또래의 귀족 영애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도도하게 군림하는 편이 주도권을 잡기에 더 좋다.

하지만 나이 든 귀족들이 많은 곳에서 그런 태도는 오히려 반감을 살 뿐이다.

조세핀은 능수능란하게 태도를 바꾸어 가며 분위기를 주도해 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라닐다 백작님.”

“오호, 조그마하던 아가씨가 그새 더 컸구나. 어엿한 숙녀가 되었어.”

“제 딸이 매우 부족하지만,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저에게 그렇게 해 주셨듯이요.”

“아니, 내가 더 가르칠 게 더 있나?”

그렇게 잉그다 부녀는 모임을 연 당사자인 백작에게도 눈도장을 찍어 두었다.

아까 전 멜라니와 클로틸드 공작도 인사를 하긴 했지만, 멜라니는 상대적으로 조세핀처럼 애교 있는 태도는 보이지 못했다.

그나마 결혼한 부인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살갑지 않아도 차분한 태도가 점수를 산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여자와 남자는 다르지 않은가.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분위기를 만들어 간 조세핀은 지금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페리어드 남작님, 저번 모임에서 얘기했던 주제를 라닐다 백작님께 여쭤보면 어떨까요?”

“오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영애.”

페리어드 남작은 높은 식견으로 몇 번 두각을 드러내, 작위에 비해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학구적인 라닐다 백작과도 가깝기도 했다.

이윽고 라닐다 백작을 위시한 모두가 한자리에 앉은 순간이 오자, 조세핀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라닐다 백작님. 저번에 예술이 궁극적으로 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조세핀은 그를 움직여 멜라니와 클로틸드 공작은 전혀 모르는 주제로 대화를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대화에서 흥미를 보이는 인물들은 전부 조세핀이 먼저 말을 걸어 가며 반가움을 표했던 귀족들이었다.

“확실히 그때 잉그다 영애의 식견이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영애가 어린데도, 시야가 넓어요.”

“하하, 그런 이야기를 하다니. 조세핀이 많이 배웠나 봅니다.”

잉그다 후작은 옆에서 보조해 주는 정도로만 말을 보탰다.

“…….”

어느 순간부터 조세핀의 뜻대로, 멜라니와 클로틸드 공작은 대화에 끼지 못한 채 소외되고 있었다.

조세핀과 잉그다 후작이 바란 대로였다.

게다가 멜라니 쪽은 특히 이쪽의 대화 주제에 그다지 집중하지도 않는 듯했다.

‘지금이 딱 좋은 흐름이야.’

조세핀은 잉그다 후작과 눈짓을 교환하고는, 상냥한 얼굴로 멜라니에게 말을 걸었다.

“방금 한 말에 대해 클로틸드 영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사실 저번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서 여러분이 하는 말은 잘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고요.”

그럴 만했다. 일부러 전에 했던 이야기를 생략해 가면서 대화를 이어 가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조세핀은 그런 멜라니의 지적에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놀라워했다.

“어머,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따라오기 힘드셨다면 사과드려요.”

“흠…… 클로틸드 영애는 모임에 자주 나오는 게 좋겠어.”

옆에서 잉그다 후작이 여상하게 말을 보탰다.

이것으로 멜라니는 ‘어려운 이야기도 잘 모르는데 배우기 위해서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는 영애’가 되었다.

“저는 검은 달이 워낙 유행만…… 어머, 죄송해요. 세련된 걸 많이 하시다 보니 기존의 것에 대한 이해도가 크신 줄 알았거든요. 저는 기존의 것도 따라가기 벅찬데 말이에요.”

그러더니 조세핀은 자신의 영상석 사업을 은근히 덧붙여 언급했다.

검은 달은 ‘유행’만 따라가지만, 자신이 하는 영상석 사업은 정말 중요한 ‘고전’과 ‘역사’ 등을 주로 다룬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많은 분들이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연극을 다시 영상석으로 만들 예정이기도 하고요.”

“<13번째 기사>! 그래, 내가 기사에서 봤지!”

“후후, 많은 관심을 받는 작품이니만큼 잘 만들 수 있을까 하는 부담도 들지만요.”

“오늘 영애와 대화를 해 보니 믿음이 가는걸? 자신감을 가지라고!”

그러자 아까 조세핀과 친근한 대화를 나눈 귀족 몇이 마음에 든다는 눈빛을 보내는 게 보였다.

“귀족 영애들은 결혼을 위해 치장만 열심히 하자는 분위기지만…… 저는 특히 제국의 귀족들이 자부심을 가지는 고전이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되어서요.”

그리고 분위기를 읽지 못한 귀족 하나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치장만 하느라 머리가 텅 빈 귀족 영애들이 많이 있던데. 잉그다 영애는 좀 다르시군요.”

이 모임에 얼마 되지 않은 미혼 영식이다 보니 조세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맞장구를 친 거다. 자신은 똑똑하다는 자랑도 할 겸.

하지만 그게 결과적으로는 멜라니를 공격하듯이 말한 셈이 되었다.

“…….”

잠시 감도는 어색한 분위기.

“어, 어라?”

맞장구를 친 영식이 늦게서야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나 눈만 끔뻑이고 있노라니, 옆에서 잉그다 후작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좋게 봐 주다니 고맙네.”

“가, 감사합니다?”

“딸이라고 나에게만 예뻐 보이는 줄 알았는데, 오늘 이렇게 후한 평가를 받으니 기분이 좋군요.”

“앞으로도 정진할게요, 아버지.”

“허허, 그래. 조세핀이 영애들의 모범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잉그다 후작은 멜라니를 보더니 넌지시 덧붙였다.

“하지만 조세핀이 앞장서서 분위기를 이끈다고 해도, 따라오지 않을 것 같은 영애도 분명 있을 터이니……”

“그러지 마세요, 아버지. 다들 사정이 있겠죠.”

“그래 봤자 게으르거나 능력이 부족한 거지. 진흙에서도 피는 꽃은 있기 마련이다.”

잉그다 후작은 멜라니가 아파서 못 나온다는 변명이 나올 여지마저 바로 잘라 버렸다.

“세상에 사정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그러나 잠시 뒤, 잉그다 후작은 늦게서야 깨달았다는 듯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 죄송합니다. 사교 모임에 잘 나서지 않는 클로틸드 영애를 가리켜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얼핏 들으면 멜라니를 생각해 주는 듯, 하는 말.

하지만 정말로 멜라니에게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눈치가 느린 사람까지도 ‘게으르거나 능력이 부족한 영애’에 멜라니가 해당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잉그다 후작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래도 딸아이가 인기가 많다 보니…… 다른 여자가 좋다 하던 남자도 결국엔 조세핀이 좋다고 하기도 하고.”

멜라니를 언급한 뒤에 ‘다른 여자가 좋다 하던 남자’를 말하니 그게 꼭 폴리우스를 말하는 것 같다.

결국엔 조세핀을 좋아한다고 하니 더더욱 그렇고.

“하긴 여자로서 매력이 더 뛰어나다고 하면, 남자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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