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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37)화 (37/90)

<37화>

멜라니를 가리킨 말이 아니라고 하더니, 왜 자꾸 멜라니를 연상시키는 말을 하는가.

“잉그다 후작, 지금……”

하지만 잉그다 후작은 클로틸드 공작이 나서기도 전에 먼저 미안하다고 나섰다.

“어이쿠, 아무래도 조세핀이 두각을 드러내다 보니. 제가 들뜬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딸 자랑도 정도껏인데.”

후작이 사과를 했기 때문에 클로틸드 공작은 나서기 힘들어져 버린다.

가만히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멜라니는 잉그다 후작을 지그시 바라보며 생각했다.

‘내가 아픈 건 다 핑계고, 본인 딸이 제일 잘났다 이건가? 게다가 조세핀이 여자로서 매력이 넘쳐서 폴리우스가 눈을 돌리는 것도 어쩔 수 없고?’

결국은 모든 면에서 멜라니보다 조세핀이 더 낫다는 소리다.

여기서 나서면 괜히 소심하고 옹졸한 사람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있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상황이다.

어떤 쪽을 택하건 클로틸드 역시 손해를 보는 상황.

‘이런, 난감하네.’

싸해진 분위기, 마찬가지로 제 딸을 아끼는 클로틸드 공작이 나서려는 그때.

모임의 주최자인 라닐다 백작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하하하, 그래. 잉그다 후작도 오늘은 좀 말이 많군요. 영애가 요즘 마음에 들어 하는 남자가 있나 봅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잘되려는 모양인데……”

“축하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벨데르트 영식이 클로틸드 영애에게 지극하던데, 잉그다 영애도 좋은 짝을 만나면 좋겠군요.”

은사인 라닐다 백작이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여상하게 말을 이어 가자, 클로틸드 공작도 끼어들기 어려운 모양새가 됐다.

옆에 있던 사람이 눈치를 보다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하하, 벨데르트 영식이라면 다미안 마탑주님을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 그분은 그냥 마탑주라고 보통 말하지 않나? 나는 폴리우스 벨데르트 영식을 말한 것이었는데요.”

순간 연회장이 정적에 휩싸였다.

맞장구를 쳤던 남자는 두 눈을 껌뻑이더니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포, 폴리우스 벨데르트 영식이라면……”

“네, 클로틸드 영애의 약혼자 아닙니까? 내가 얼마 전에 극장이 많은 거리에서 그가 클로틸드 영애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평소 라닐다 백작은 학문에 힘을 쓰는 대신, 사교계에 들리는 소문에 밝지 못했다.

그는 분위기가 싸해진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나이에 맞지 않은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허허, 그게 일주일 전이던가? 약혼한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아직도 그렇게 애절하다니 보면서 참 마음이 훈훈하더군요.”

“……다미안 벨데르트가 아니라, 폴리우스 벨데르트가 확실합니까, 백작님?”

잉그다 후작이 라닐다 백작의 말에 짓씹듯이 물었다.

여태까지 딸아이의 넘치는 매력 때문에 폴리우스가 빠진 것으로 그의 바람을 미화하려는 시도를 하는 중이었다.

바람은 나쁜 거지만, 빼앗긴 여자도 단속을 잘하지 못했다는 둥 매력이 부족하다는 둥 말은 어떻게든 나오기 마련.

그렇다면 이 기회에 조세핀을 마성의 여자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그 전리품이, 다시 멜라니에게 매달린다면 오히려 꼴사나운 건 조세핀이 되지 않은가?

‘다 되어 가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웬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야. 둘이 끝난 지가 언젠데.’

잉그다 후작은 여유로운 척 미소를 지어 보이려 했다.

“잘못 아신 듯합니다. 폴리우스 벨데르트 영식은 클로틸드 영애와 헤어진 지 오래거든요.”

“하하, 벨데르트가 두 영식은 머리 색이 완전히 다르지 않나요! 내가 사람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갈색이라는 건 분명히 보았답니다!”

지식이 상당한 대가로 눈치를 바친 라닐다 백작은 잉그다 후작이 표정을 굳히는 건 알아차리지 못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아하, 뭐라고 했더라. 본인한테 대표를 시켜 달라고 했던가? 같이 일하면 최고의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했던가……”

다미안 마탑주는 이미 대표다.

그러니 멜라니에게 굳이 대표를 시켜 달라고 애원할 필요가 없다.

그 사실을 깨달은 잉그다 후작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조세핀은 라닐다 백작의 입을 다물게 하려고 나섰다.

“잘못 보신 듯합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폴리우스 영식은 저와 영상석 사업을 같이할 거라 했고, 저와 좋은 감정으로 만나고 있거든요.”

예전에는 약혼할 거라 말했지만, 클라라의 난입으로 망신을 당한 뒤로는 최대한 중립적인 표현을 고수하는 조세핀이었다.

“어, 어? 그런가? 내가 잘못 봤다고?”

하지만 라닐다 백작이 당황하며 얼버무리려는 그 순간, 옆에서 다른 귀족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착각일 리가 없는 게…… 저도 실은 일주일 전에 폴리우스 벨데르트 영식이 클로틸드 영애와 함께 있는 걸 봤습니다.”

그리고 그 귀족은 하나가 아니었다.

“사실은 저도 들었습니다…… 교수님이 들었다는 말과 똑같은 내용이었고요.”

“그…… 극장이 모여 있는 거리에서 함께 있었는데. 본 사람이 한 명일 리는 없지 않소. 으흠.”

오늘은 라닐다 백작을 주축으로 모인 모임이었고, 몇몇이 조세핀을 좋게 봤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은사가 먼저였다.

다른 사람들이 동조하자 라닐다 백작은 뺨을 긁적이며 말을 덧붙였다.

“역시 제가 본 게 맞네요! 헤어졌는데 왜 클로틸드 영애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매달렸겠어요? 내가 본 건 분명 보통 사이가 아닌 모습이었는데.”

“그…… 저기. 교수님.”

“으음? 내가 뭘 잘못 말했나?”

그걸로 확인 사살이었다.

아까만 해도 길을 걷다가 우연히 만났다든가, 스쳐 지나가다가 인사만 했다든가…… 어떻게든 수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간절하게 매달렸다느니, 사이가 좋아 보인다느니. 온갖 말이 다 나왔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그 와중에 눈치 없는 라닐다 백작은 옆에서 속닥거리는 귀족의 안간힘에도 큰 소리로 되물었다.

“대표를 시켜 달라고 했으니 그게 다미안 영식일 리가 없다고? 아하, 그렇구만! 그럼 폴리우스 영식은 클로틸드 영애에게 헤어졌는데 매달린 거야?”

“아이고, 교수님.”

기껏 속삭이며 상황을 말한 보람이 없었다. 옆에 있던 귀족은 안타까움에 혀를 찼다.

정황상 잉그다 쪽에서 아까부터 공격한 쪽은 클로틸드 같은데, 이렇게 나오면……

‘헉, 표정이 심상치 않다.’

아니나 다를까. 잉그다 후작은 시뻘건 얼굴로 화를 애써 참고 있었다.

딸인 조세핀의 얼굴 역시 그와 다르지 않았다.

‘여태까지 폴리우스랑 영상석 사업할 거라고 떠들고 다녔어. 약혼할 거라고도! 그런데 저 멜라니 클로틸드한테 매달렸다면, 그럼 내가 뭐가 돼?’

이때 멜라니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녀가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죄송해요. 잉그다 영애가 폴리우스 벨데르트 영식과 약혼할 거라고 이야기를 하고 다니기에…… 상처드릴까 봐 말씀드리지 못했거든요. 숨기려고 했던 건 아니랍니다.”

멜라니는 이후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저는 멍청하게 남의 남자 빼앗으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부류는 아니거든요. 정말 별일 없었답니다.”

아까 잉그다 후작이 한 말을 정확히 꼬집는 말이었다.

“그냥…… 검은 달의 대표가 되고 싶다. 같이 사업하고 싶다. 그게 다였어요.”

“…….”

“그런데 아까 잉그다 영애가 벨데르트 영식과 영상석 사업한다고 하는 건 뭐였어요? 영애, 한번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러나 여상해 보이는 멜라니의 태도 때문에 아까 한껏 잘난 척하던 조세핀과 잉그다 후작의 처지가 이상해졌다.

거기에 클로틸드 공작도 가담했다.

“그래요. 내가 우리 딸을 어떻게 키웠는데, 멜라니를 첫 번째로 두지 않는 남자에게는 못 보냅니다.”

“아버지.”

“저는 멜라니가 뛰어난 성취를 이루기를,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건강하고 행복하기만을 신께 기도하지요.”

멜라니의 어깨를 감싸는 큰 손은 따뜻했다.

보는 이들은 과연 클로틸드 공작은 진정으로 딸을 사랑한다며 감탄했다.

“정말 좋은 아버지시군요, 공작님.”

“저도 딸에게 그런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걸 아는데, 허허. 쉽지가 않더군요.”

그리고 잉그다 후작은 졸지에 딸에게 온갖 부담을 바라는 치졸한 아버지가 되었다.

‘이번 일로 폴리우스가 멜라니를 찾아갔다는 소문이 오히려 더 퍼지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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