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38)화 (38/90)

<38화>

“아이고, 내가 괜한 말을 꺼내서.”

뒤늦게서야 분위기를 파악한 라닐다 백작은 잉그다 후작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미 옆 사람들까지 분위기를 탄 터라 전혀 쓸모는 없었지만.

결국 잉그다 후작과 조세핀은 허둥지둥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벌써? 혹시 내가 하면 안 되는 말을 꺼내서 그런 건 아니지?”

“그런 것 아닙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가자, 조세핀.”

“아, 아버지.”

이내 두 사람은 도망가듯 자리를 떴다. 당사자가 사라지자 말소리가 커진 것은 당연했다.

“아까 그렇게 잘난 척을 하더니……”

“보면 잉그다 영애도 은근히 헛똑똑이란 말이야?”

“아버지가 되어서 딸이 남의 남자 빼앗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면 쓰나. 정말 사랑하면 그럴 수가 없지.”

* * *

희끄무레한 눈이 아스라이 흩날린다.

열린 마차의 창으로 들어오는 서늘한 바람.

마른 풀밭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멜라니, 문을 닫아야지.”

“네.”

어색한 대답에 아버지는 흠칫 놀라더니 덧붙이셨다.

“내가 춥다는 게 아니라, 네가 걱정되어서……”

“아, 알고 있어요.”

상단 일로 아직 화가 안 풀리셨을 줄 알았는데, 나한테 실망하신 줄 알았는데.

그 이후로 차마 먼저 말을 걸 염치도 용기도 없어서.

오늘도 함께 모임을 가면서도 속으로는 무거운 걱정을 떠안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 편을 들어 주셨고, 지금 역시 나를 계속해서 염려하고 계셨다.

“…….”

“…….”

마차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크흠……”

겸연쩍은 헛기침 소리.

아버지는 나에게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걸까?

하지만 나는 차마 먼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냥 하염없이 마차의 창 너머만 바라볼 뿐.

‘그래도 나를 미워하지는 않으시나 보다.’

내가 어떤 성취를 이루든지 상관없다는 말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 이후로도 어색한 공기만 감돌고,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뭐…… 그렇게 나쁘지 않은 분위기였던 것 같다.

* * *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건 내게 있어서 쉽지 않은 일이다.

때문에, 오늘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 전 충분히 쉬는 시간을 가졌다.

더군다나 저번 모임은 수도 근교에서 이루어졌지만, 이번에는 굉장히 멀리까지 떠나는…… 제대로 된 이동이었다.

물론 중간에는 게이트가 있어서, 거리에 비하면 편하게 가는 거지만 말이다.

“다미안 마탑주님.”

그리고 함께 마차를 탄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다미안 마탑주였다.

“어서 오십시오, 대표님.”

상대가 아버지가 아닌 남자였는데도. 마차 안에서는 여러 이야기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확실히 홈시어터 건으로 영상석이 그저 한때 유행이라고 하던 고위 귀족들까지 사로잡았어요. 황제 폐하까지도 홈시어터 설치에 대해 물어보시더라고요.”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다행입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수도에서는 유행이지만, 상대적으로 배송이 어려운 지방에서는 검은 달의 열기가 와닿지 않는다는 것.

배송 문제를 해결해 볼까 했지만,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느낌이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수도에 비해 문화생활을 즐길 인구수가 적기도 하고요.”

“그럼 차라리 그 소수만 노려서……”

라고 말하게 된 게, 영화관처럼 큰 홈시어터를 두고 관객들이 즐기게 하는 거였다.

하지만 그런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우기 전에 먼저 탐사를 해 보자 싶어서 같이 둘러보기로 했다.

지금 나와 다미안 마탑주가 향하는 곳은, 수도에서 꽤 떨어진 제국의 남부였다.

‘다른 곳은 직원들이 잘 살펴 주겠지.’

마음 같아서는 내가 다 확인하고 싶었지만, 요즘 몸이 안 좋아서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일과 관련된 대화 주제는, 점점 상관없는 방향으로 튀었다.

“여기는 벌써부터 봄이네요.”

사업 때문에 가는 거지만 들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수도 밖으로 나온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나는 수도에서는 볼 수 없는 산이나, 특이한 모양의 언덕 따위를 보며 연신 눈을 빛냈다.

얼마 전 수도 근교에서 보았던 마른 풀밭과 눈이 아니었다. 외투를 입지 않아도 공기가 따뜻했다.

달콤한 봄의 향기.

다채로운 색으로 가득한 꽃밭.

약속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토록 환하게 피어나다니.

‘이야, 놀러 온 건 아닌데. 자꾸 설레어.’

어쩌면, 정말 어쩌면 이 풍경을 내가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그 풍경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다미안 마탑주님은 여행 좋아하세요?”

파란빛의 선명한 하늘과 대비되는 분홍색 꽃나무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여행은커녕 마차를 이렇게 오래 탄 지 오래되어서, 일 때문에 가는 거라지만 엄청 들뜨고 설레네요.”

나는 아득한 과거를 헤아리며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 본 게 마지막이에요.”

“그때는 어디로 가셨습니까?”

“켈리니드 섬 아세요? 어렴풋하지만, 굉장히 좋았던 기억만 있어서 한 번 또 가 보고 싶네요. 거기도 제국 남부라 겨울에도 날씨가 참 따뜻하잖아요?”

“아, 그렇다고는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미안 마탑주는 켈리니드 섬에 대해 그다지 잘 아는 기색이 아니었다.

귀족들이 휴양을 떠나는 대표적인 섬 중에 하나라 다미안도 당연히 가 봤을 줄 알았는데.

“사실 저는 여행을 가 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래요? 자주 안 가셨어요?”

나처럼 몸이 나쁜 것도 아니면 자주 돌아다니지. 아까운 일 아닌가.

“아예 한 번도 안 가셨다고요?”

다미안 마탑주는 이번에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과거를 더듬는 기색이었다.

“가문에서 나와 마탑으로 향하는 과정이 여행과 비슷하다면 할 수 있겠지만……”

다미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다지 즐겁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더 깊게 묻지는 않았다.

어린 소년이 마탑으로 향하는 길이 쉽지 않을 건 뻔했다.

다미안처럼 누가 봐도 귀족 도련님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나는 아연해져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럼 누구랑 여행 한 번도 안 가 본 거야? 어린 시절에도?’

아니, 마탑에 들어간 이후로는 바빠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벨데르트 백작가에 있을 때도 한 번도 안 가 봐?

“그냥 집안의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내가 실례를 저지른 건가 안절부절못하는 것과는 반대로, 다미안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내가 당연히 가 봤을 거라고 생각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폴리우스는 밀라 부인이랑 여행 자주 갔다고 알고 있는데.’

몸이 좋지 않아 여행을 가지 못하는 내게 자랑을 그렇게 해 댔단 말이다.

내가 입을 열지 않는 걸 본인의 눈치를 본다고 생각했는지, 다미안 마탑주는 배려하듯 덧붙였다.

“그냥, 저희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어머니가 아프면 아버지랑 가면 되잖아. 폴리우스는…… 벨데르트 백작과 단둘이서도 여행 갔다고 하던데.’

너무 대비되지 않은가.

본부인과 왜 본부인의 자식만 고통받아?

나는 울컥 감정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이야기 안 꺼냈지!

내가 그렇게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닌데!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음…… 오늘 저랑 가는 걸 여행이라고 생각하시면 어때요?”

하지만 막상 말을 내뱉어 놓으니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나랑 놀러 가는 게 뭐라고, 대단한 것처럼 말하는 거야?’

차마 당당히 시선을 마주하지는 못하고, 흘긋 다미안 마탑주를 곁눈질하는데……

어라, 의외로 다미안은 냉소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여행이라고요.”

오히려, 조금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좀 멍한 얼굴이었다.

“저에게 함께 여행을 가자고 한 건 클로틸드 대표님이 처음입니다.”

“정말요?”

“대표님께서 제게 빈말로 제의하신 게 아니라면 말입니다.”

“어,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어요.”

“그렇습니까.”

다미안 마탑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럼 제 첫 여행은 클로틸드 대표님과 함께이겠군요.”

때마침 불어온 선선한 봄바람에 그의 머리가 살랑였다.

이 계절에 어울리는, 조금은 풀어진 다미안 마탑주의 모습을 나는 눈을 떼지 않고 오롯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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