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 * *
“그렇게 바깥을 계속 보는 게 나으실 겁니다. 저는 멀미를 안 해서 잘 모르지만, 시야가 탁 트인 것을 보는 게 좀 낫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창이 달린 한쪽 방향만을 보고 있노라니 목이 아파서 마차 안으로 고개를 돌린 내게 다미안 마탑주가 한 말이었다.
“목이 아프시다면 저와 자리를 바꾸시지요.”
“괜찮은데……”
“저 역시 그 김에 바깥 풍경도 좀 더 보고요.”
“그럼 배려 감사히 받겠습니다.”
너무 양보만 받는 것 같아 사양하려 했지만, 생각해 보니 그러면 다미안 마탑주의 목도 덜 아플 것 아닌가.
자리를 바꾸는 건 둘 다 좋은 일이었다.
“속은 괜찮으십니까?”
“음……”
사실 바깥을 쳐다보고 있었던 게 풍경이 아름다워서만은 아니었다.
원래 이렇게나 오래 마차를 타는 건 다른 사람도 힘들겠지만, 내 약한 몸은 조금의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했으니까.
다미안 마탑주 말마따나 바깥을 보고 있으면 그나마 힘든 것이 덜한 것 같아서 말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보통 체력 소모가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최대한 아픈 티를 내지 않았는데도 다미안 마탑주는 알아차렸다.
내가 하루 이틀 아픈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는 당연히 숨길 줄 안다.
매일 아프다는 소리를 내뱉은 환자를 누가 좋아한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마음껏 아파하는 건 내 방에 아무도 없을 때만인데…… 이상하게 다미안 마탑주에게는 매번 들킨다.
이 정도로 예리한 건 여태 우리 아버지밖에 없었는데 말이야.
“클로틸드 대표님은 저 꽃나무의 이름을 아십니까?”
“모르겠는데요.”
흐드러지게 핀 흰 꽃이 스치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은 꼭 흰 꽃 나무가 인사하는 것 같기도 했다.
풍성한 꽃잎이 저렇게나 한 꽃을 이루는 모양이라, 으음. 알 것 같기도 한데.
역시 금방 떠오르는 이름은 없었다.
내 대답에 다미안 마탑주는 짤막하게 말했다.
“그럼 잠시 내려서 관찰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그러시죠.”
나에게 꽃 이름을 물을 정도라니, 특이한 마법 식물인가 생각했다.
우리는 곧 마차를 멈추고 꽃나무가 만발한 나무 그늘에 자리를 폈다.
“저는 배꽃 나무밖에 모르는데, 생김새가 배꽃 나무는 확실히 아닌 것 같아요.”
“꽃사과 나무, 산사나무, 고광나무…… 흰 꽃이 피는 나무는 아는데, 봐도 잘 모르겠군요.”
“고매한 지식을 갖추신 마탑주님께서 모르시는 것도 있네요. 이번엔 제가 도움을 드리고 싶지만. 수도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렵던 나무 같아요.”
“고심하실 것 없습니다. 머무르는 동안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겠지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다미안 마탑주가 나를 배려해서 잠시 쉬어 가겠다고 한 것임을 알아차렸다.
“그 김에 저도 조금 쉬고요.”
그래, 사실 저 꽃나무의 이름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겠어.
“맞아요. 사실 영영 모른다고 해도 뭐 어때요. 사실 제가 모르는 거면 다른 사람들도 다 모를 게 분명해요.”
“자신감이 지나친 모습, 보기 좋군요.”
“자기 자신한테 자신감을 가지는 건 좋은 거죠!”
뭐, 내가 몸을 조심하고는 있지만.
사실 인생은 어떻게 흐를지 몰라서 소설에서는 내년에 죽었어도, 폴리우스와 헤어진 지금은 당장 오늘 저녁에 내가 쓰러질 수도 있다.
“최대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게 최고라니까요. 남들 눈치 보다가 참지만 말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요.”
다미안 마탑주가 멍하니 그 말을 되뇌었다.
뭔가 방금 말, 의미심장하게 들렸는데. 기분 탓인가?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금세 털어 버렸다.
사실 본인이 뭐라고 하는 게 아닌 이상 괜히 신경 쓰는 건 귀찮은 일이다.
“네, 저는 달라지겠다고 마음먹은 뒤 폴리우스와 파혼하는 것으로 첫걸음을 내디뎠지요!”
“대단하시군요.”
“네, 그러니까 꽃 이름은 몰라도 꽃은 예쁘다고 생각하려고요. 어차피 외워도 까먹을 것 같고.”
그때, 바람에 흩날리던 흰 꽃잎이 웃고 있던 내 보조개에 내려앉았다.
다미안 마탑주는 그 모습을 보더니 느린 손짓으로 내 볼에서 꽃잎을 떼 주었다.
“네, 예쁘긴 하네요.”
오, 방금 설렜다. 주어가 없어서 순간 나보고 하는 말인 줄 알았거든.
아닌 걸 바로 알아차렸지만 말이다.
민망해진 나는, 쑥스러워하기보다는 오히려 큰 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나. 방금 저보고 예쁘다는 줄 알고 설렜지 뭐예요?”
“그게 아니라, 꽃이 예쁘다는……”
“그래서 방금 바람둥이 같았어요.”
다미안 마탑주는 내 발언에 잘생긴 눈썹을 찌푸렸다.
“저만큼 스캔들이 없는 영식도 없을 텐데요.”
“하하하,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네요?”
명랑한 내 웃음에, 다미안 마탑주는 곧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어디 가서 지는 사람은 아닌데, 영애에게는 항상 휘둘리는 기분이군요.”
“좋네요. 그 얼마 안 되는 경험 귀중하게 생각해 보세요.”
마차에서 내린 김에 우리는 싸 온 샌드위치를 먹었다.
버터 향이 나는 부드러운 빵, 달콤한 잼, 짭조름하면서도 고소한 햄. 아삭아삭 씹히는 양상추와 상큼한 토마토.
하늘에 무수히 날아가는 흰 꽃잎들을 보아하니 며칠 뒤면 이 꽃은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시기를 잘 맞춰서 남부에 온 셈이었다.
“오늘 이곳에 오길 참 잘했네요.”
나는 폐부까지 맑은 공기를 훅 삼키었다가, 개운하게 내뱉었다.
아, 오늘 날씨 한 번 좋다.
* * *
그리고 목표했던 도시에 도착한 우리는, 극장으로 향했다.
-여보, 이 아이는 내 아이야. 오늘부터 이곳에서 자랄 거야.
-혹시 당신과 레이아 씨 사이에서 낳은 아이인가요?
-그래서 싫다는 거요?
-아뇨, 당신의 아이라면 내 아이와도 같아요.
그렇지만…… 예상했던 대로 연극은 아쉬웠다.
요즘 수도에서는 이미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었다는 평을 들은 연극들만 볼 수 있었다.
확실히 유행에 뒤처지긴 하는군.
‘그런데 정말 잉그다 영애 말대로 내가 너무 유행만 추구하나?’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확실히 시대의 흐름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긴 했다. 그러나.
“여자가 아픈 시부모를 극진히 보살피는 사이, 유학을 간 남자는 현지처와 아이를 낳는다니.”
옆에서 연극을 보고 있던 다미안 마탑주가 어이가 없다는 듯 비웃었다.
“남편과 불륜을 저지른 여자에게 오히려 남편을 보살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는 걸 현명한 아내의 모습으로 그리기까지. 역시 수백 년 전 연극답게 고리타분하군요.”
“네. 제 생각도 그래요.”
남편이 바람피워서 낳아 온 아이를 제 자식처럼 키우는 걸 현명한 여성상으로 그리는 건 역시 교훈적이지도 않은 것 같아.
연극은 단순히 유행의 문제는 아니었다.
이미 수도에서 똑같은 연극을 봐서 그런지, 배우 풀이 좁고 연출에서도 아쉬운 장면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남편은 이런 짓을 해도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미남 역인데 웬 아저씨가……’
외모며 나이대며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나.
꼭 나이대에 맞는 역을 할 필요는 없지만, 부모를 잃은 소년이 너무 중후하다.
음, 솔직히 내 옆에 있는 다미안 마탑주가 더 잘생기지 않았나?
‘흐음. 어디 보자.’
나는 새삼스럽게 다미안 마탑주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는 빼어난 이목구비 같은 것이나, 날렵한 턱선에 시선이 간다면.
특유의 이지적인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무심한 듯 세상에 달관한 분위기에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이래서 다미안 마탑주님이 더 주목받는 건가?’
극장에서 나와 식당으로 오는 길에…… 사람들이 계속 힐끔거리는 게 옆에 있는 나한테도 다 느껴지더라.
원래도 잘생긴 남자를 쳐다보는 거야 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심하게 주목을 받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고. 말 걸고 싶어 하고.
“자기야, 누굴 보는…… 허업.”
여자가 정신없이 보자 질투심에 고개를 돌렸던 남자도, 같이 넋을 잃는다.
‘저기요, 당신도 미모 감상하면 어쩌자는 건데?’
수도가 인구 밀도도 높고, 더 많은 사람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다미안 마탑주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많다 보니 마탑주라는 권위에 함부로 다가오지 못했다는 걸 알겠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식사만 하고 있는데도 얼굴로 주목을 이렇게나 받다니.
새삼 잘생긴 외모였어.
‘하긴, 피부도 저렇게 매끈하고. 속눈썹도 긴데 곱상한 느낌만 드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빤히 보고 있자 시선을 의식한 다미안 마탑주가 변명 같은 말을 꺼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떤 여자와도 교제한 적 없었습니다. 고백을 받은 적은 있지만, 전부 거절했고요.”
“저는 아무런 말도 안 했는데요?”
의아해하는 내 말에 다미안 마탑주는 다소 쌀쌀맞게 대꾸했다.
“아까 바람둥이 같다고 한 말이 신경 쓰여서 그렇습니다. 괜한 오해를 사는 건 불쾌하니까요.”
하긴, 이번에도 일방적으로 관심을 받고 있을 뿐. 다미안 마탑주가 무슨 일을 한 건 아니다.
아직 약혼한 것도 아닌데, 그래도 나와 만나는 동안은 다른 사람과 의미 있는 관계가 되지 말아 달라는 내 부탁을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그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제가 약혼자라고 말할 수 있도록……”
“그건 아닙니다.”
“쳇.”
좋다 말았군.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는 게 있었다.
“그럼 남자와도 사귄 적 없어요?”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