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나는 당황해서 되묻기까지 한 다미안과는 반대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저번에도 그렇고 제가 미처 남자한테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어요. 남자와도 연인이 되지 않겠다고 말씀해 주세요.”
“무슨 남자까지……”
“편협한 생각 하시면 안 돼요. 저기 남자들까지 마탑주님을 보고 있잖아요.”
그런 말을 하며 나는 휙,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람들이 움찔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나는 혀를 차며 다시 정면을 보았다.
‘여자만 경계하다니, 내가 너무 시야가 좁았어.’
나는 얼마 전에 읽었던 시나리오 중, 약혼자가 남자와 바람났던 내용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아니, 모든 사람을 다 경계해야 하는 거야?’
폴리우스도 못생긴 건 아니었지만 말이야. 솔직히 이 정도는 아니었거든?
잘난 인간 옆에 있는 게 이렇게 신경 쓸 게 많을 줄이야.
“제가 그렇게 인기가 많은 타입은 아닙니다.”
“뭐라는 거야……”
평소 본인이 너무 인상만 쓰고 다녀서, 또 너무 냉정하게 구니까 얼굴 보고 온 사람들이 도망간 것뿐이잖아.
인기가 다미안에 비할 정도는 아닌 폴리우스도 거들먹거리는데 왜 이 사람은 자신이 인기가 없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담.
“클로틸드 대표님께서는 제가 꿀을 두른 꽃처럼 보이십니까? 다른 사람들은 벌이고?”
“크게 다르지는 않네요.”
“…….”
“아니, 사실 고작 그 정도는 아니죠. 마탑주님은 꿀통 자체라고 할까.”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나는 진지하게 대답했으나, 다미안 마탑주는 내 말에 영 떨떠름한 반응이었다.
누가 보면 내가 애인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주접을 떠는 사람인 줄 알겠어.
‘하지만 나는 진실만을 내뱉고 있다고!’
상대가 마탑주다 보니 직접 말 걸지는 못해도, 내심 좋아하는 사람들은 엄청 많았을 게 분명한데.
이런 내 마음을 다미안 마탑주는 영 몰라줬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영애와 만나는 동안은 누구와도 만나지 않겠다고요.”
“죄송해요. 하지만 잘생긴 남자와 만나는 제 입장도 헤아려 주시겠어요?”
하아, 역시 제안한 것도 계약 약혼이어서 다행이다. 진짜 약혼이었으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겠는가.
“……혹시 이거 제가 잘났다는 말을 돌려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아니, 됐습니다.”
다미안 마탑주가 굳이 반박하지 않겠다는 듯 말을 이었다.
“마저 드시기나 하시죠.”
그렇게 다미안 마탑주는 혼자 수긍하는 듯하더니 다시 고개를 음식으로 떨구었다.
담담한 대꾸와는 달리 귀가 좀 빨개진 것 같기도 한데, 전반적으로 이곳의 디자인이 붉어서 확실히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후 우리는 가장 인기가 많다는 메뉴를 해치웠다.
남부에서만 볼 수 있다는 해산물 요리는 익숙하지 않은 향신료가 코끝을 찔렀지만, 의외로 내 입맛에 맞아 계속해서 잘 넘어갔다.
식사를 끝낸 우리는 산책 겸 쉬엄쉬엄 돌기로 했다.
다미안 마탑주는 좀 더 쉬자고 했지만 어차피 밥 먹고 앉아 있으면 소화가 안 된다.
“이런 느낌의 장소에 영화관 건물을 크게 만든다든가…… 아니, 영화관만 같이하는 게 아니라 건물 자체가 문화를 위한 공간이라거나. 놀 수 있는 공간인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이 건물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특별한 느낌이 들게끔……”
옥상에는 인테리어에 굉장히 힘을 준 카페라거나, 여러 가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도 함께 있으면 좋겠다.
수도의 고급 물건이라거나…… 백화점식으로.
“제가 너무 두서없게 이야기하나요?”
“아닙니다. 무슨 뜻인지 다 알아들었습니다.”
가끔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나는 생각과 말이 똑같이 나올 때도 있는데, 다미안 마탑주는 그때마다 다시 물어보는 일이 없었다.
괜히 다 안다고 그러나 싶었는데, 질문을 던지면 다 이해한 건 맞더라고.
“어떻게 다 알아들으세요?”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곧 덧붙였다.
“그렇지만 아이디어가 있어 봤자 구체화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닙니다. 영애가 대단한 거죠.”
음, 확실히 내가 아플 때 나름 배려해 준다고 하는 거 말고는 입에 발린 소리 안 하는 사람인 것 같다.
“맞아요, 저는 대단해요. 그리고 저를 파트너로 두신 다미안 마탑주님도 대단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사업적인 감각도 있고, 나와 추구하는 가치관이 같아서 비슷하다는 걸 느낀다.
일방적으로 맞춰 준다는 느낌이 안 드는 게 신기했다.
‘폴리우스는 나랑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으면서, 대표 소리를 꺼냈네.’
기가 찬 일이다. 나는 폴리우스가 저번에 찾아와 지껄이던 개소리를 떠올리며 피식 비웃었다.
‘뭐, 그래도 폴리우스가 아니었더라면 다미안 마탑주님과 이렇게 만나서 인연을 맺을 일도 없었을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고마운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 사라졌다.
폴리우스가 위기를 만든 걸 내가 극복해 낸 게 대단하지, 폴리우스 덕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음…… 이제는 마탑주님하고 있는 게 편해.’
나는 좀 더 가벼운 주제로 마탑주에게 말을 걸었다.
“마탑주님. 혹시 저런 크기의 영상석을 만드는 건 어려울까요? 대충 저 건물만 한 크기로요.”
“설마 저 산만 한 건물을 말씀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마탑주님이시라면 가능하실 것 같아서요.”
“여태까지 저와 일하면서 마법 상식이 많이 느셨다고 생각했는데요.”
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이에요. 저 정도면 가능과 불가능을 떠나 가성비가 안 나와요, 가성비가.”
“굉장히 재미있는 농담이군요. 하지만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 몸뿐만 아니라 머리도 많이 지치신 것 같습니다.”
“그럼 다미안 마탑주님이 재미있는 말 좀 해 보세요. 제 농담 평가만 하시지 말고.”
“…….”
“천하의 마탑주님께서 말문이 막히시다니. 대단히 희한한 광경이네요.”
꽤 즐거운 하루였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마차를 오래 탄 데다, 남부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걸으니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
아니, 사실은 많이…… 힘든가?
‘조금 어지럽다. 진통제고 뭐고, 체력이 다 소모됐어……’
그래도 수도로 돌아갈 시간쯤에야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든 건 다행이었다.
마음이 앞선 나를 말리며 중간에 쉬는 시간을 많이 가진 다미안 마탑주 덕분이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많이 무리하기는 했지.’
중간에 게이트를 타서 편하게 왔는데도 몸이 이렇게 힘든 걸 보니까.
“클로틸드 대표님, 안색이 안 좋습니다.”
“하하, 햇살 아래에 있었던 게 오랜만이라 그런가 봐요.”
마차에 탄 나는 눈을 감았다. 이제는 표정을 어떻게 꾸며 낼 수도 없을 정도로 나는 지쳐 있었다.
내 기색을 눈치챈 다미안 마탑주는 더 말을 걸지도 않고, 오히려 내가 마차에서 편히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게이트……’
어쩌면 마침 비슷한 시간대에 게이트를 이용할 일이 있었던 아버지와 마주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버지께 같이 사업하는 파트너라고 다미안 마탑주님을 소개해 드려야겠지?
‘음, 다미안 마탑주님이랑 우리 아버지가 만난 적 있던가. 둘 다 어떤 표정을 하려나.’
우리 아버지도 처음 만나거나 친하지 않은 사람에게 먼저 살갑게 구는 타입은 아니지만, 다미안 마탑주는 굉장히 무뚝뚝하고 내성적이지 않은가.
-19번 게이트가 가동됩니다!
-어지러움을 느끼실 수 있으나,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내 몸이 붕 뜨는 기분은 사실 별거 아니다. 아까 게이트를 통과할 때도 그랬다.
그러니, 이번에도 별거 아니어야 하는데……
“대표님?”
수도에 도착해, 동승했던 마탑주의 마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눈앞이 핑 돌았다.
“클로틸드 대표님!”
게이트로 인한 어지러움은 아니었다. 그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냥…… 몸이 말을 듣지 않았을 뿐이다.
“쿨럭.”
울컥, 기침과 함께 따뜻한 무언가가 흘러나와 내 몸을 적셨다.
‘역시 오늘 좀 무리했나.’
마차 문을 열면서 분명 눈을 떴던 것 같은데, 눈앞은 새까만 암흑이었다.
다만 생각했던 딱딱한 땅이 아니라, 어딘가 포근한 기운이 나를 감쌌다.
고통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은, 꼭 깨질듯한 머리가 맑게 개는 듯이……
“멜라니!”
나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진짜 타이밍이 잘 맞아서 게이트에서 만날 수 있었던 걸까.
‘아버지, 나를 걱정하는 목소리시네……’
그건, 내가 까무룩 잠이 들어서 알 수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