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오히려 일을 못 하거나, 잘못되면 스트레스 받아서 몸 상태가 안 좋아질지도 모르죠.”
물론 아버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안다.
하지만 성녀가 나타나면 내 몸 상태는 좋아진다. 그런 걸 설명할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여기가 소설 속 세계고, 덕분에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고 하면 몸에 이어 정신까지 이상한 사람 취급받겠지.
“사업이 궤도에 오른 게 절대 아니에요. 이제 막 시작하려는 거예요. 저만 영상석 사업에 손대려는 게 아니라, 조세핀 잉그다 영애를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도 영상석 사업에 뛰어들려고 하고 있잖아요.”
“멜라니.”
“지금 제가 일하는 시간을 줄이면 오히려 이도 저도 아니게 된단 말이에요. 제가 일했던 시간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어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아버지에게 고개를 저으며 애타는 심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저는 일하는 시간을 줄이겠다는, 금방 들킬 거짓말 같은 건 하고 싶지 않아요. 이런 저를 이해해 주세요.”
“……나는, 네가 네 어머니처럼 일찍.”
아버지는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래, 그토록 사랑한 어머니를 잃은 아버지에게 내가 쓰러진 건 커다란 충격인 걸 알겠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었다.
“내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구나. 오늘은 좀 더 쉬도록 하렴.”
아버지는 더 말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거칠게 마른세수를 한 뒤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파묻혔다.
오늘의 갈등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일이 아니라, 누구도 물러서지 않을 갈등이 될까 봐 무서웠다.
* * *
다미안이 클로틸드 공작의 책망을 순순히 감내한 것은,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사업 파트너인데, 왜 옆에 있던 사람이 쓰러진 것으로 쓴소리를 듣느냐고 멜라니는 미안한 기색이었지만 다미안은 생각이 달랐다.
어쨌든 멜라니는 자신에게 약혼을 제의했고, 자신은 바로 싹둑 거절하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을 준 건 멜라니였다.
그러니까, 클로틸드 공작이 딸의 약혼자를 대하듯 자신을 원망하는 눈을 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옆에서 더 신경 썼어야 했어.’
하지만 사업을 향해 앞만 보고 달리는 멜라니가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다.
‘좀 더 쉬자고 했어야 하지 않았나. 몸이 안 좋은 걸 알면서……’
다미안은 미간을 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마탑에 뿌옇게 떠다니는 먼지, 나른한 햇살 아래서도 그의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처음에 클로틸드 영애가 쓰러질 때 나는 분명 마력을 끌어 올렸어.’
그랬다. 갑자기 제 앞에 쓰러지는 사람이 있고, 반대편이어서 자신이 팔로 잡을 수 없다는 걸 깨닫자마자 알자 본능적으로 마력을 사용했다.
덕분에 멜라니가 땅에 처박히며 다른 부상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마력을 끌어 올렸을 때 멜라니의 표정이었다.
그녀는 분명 고통 속에 힘들어하며 몸의 통제력을 잃었다.
왜 그가 마력을 끌어 올린 순간, 표정이 그토록 편안해 보였을까?
‘일반적인 병이라면 내 마력에 반응할 이유가 없는데.’
어쩌면 스쳐 지나간 것에 불과한 그 표정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다.
멜라니가 쓰러질 동안 말리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 클로틸드 공작이 쓰러진 멜라니를 보며 순간 원망하듯 자신을 보았던 표정 등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적어도 독한 진통제라도 먹지 않으면 훨씬 편할 텐데……’
멜라니가 지금 겪는 고통은 단순히 병으로 인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독한 진통제의 부작용 역시 함께 겪고 있겠지.
‘나는 폴리우스 같은 요정의 축복은 없어.’
하지만.
다미안은 일말의 가능성에라도 매달려 보고 싶었다.
“…….”
그는 한동안 눈을 감고 침묵을 지켰다.
사방이 조용하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며칠 전의 기억들이 흘러들어 왔다.
게이트가 있다고는 해도 그곳까지는 어쩔 수 없이 마차를 이용해야 한다.
그래서 다미안은 처음에 그 시간에 멜라니와 하지 못한 사업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샌가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튀었다.
일의 효율을 중시하던 그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다미안 마탑주님은 여행 좋아하세요?”
멜라니는 분명 마차를 타는 일이 힘들 텐데도 그런 기색을 최대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행을 하는 것 같다며 웃었다.
그래서일까. 남에게는 하지 않던 이야기를 무심코 꺼내 버린 건.
“사실 저는 여행을 가 보지 않아서 잘 모릅니다.”
“그냥, 저희 어머니가 몸이 좋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이상했다.
“그럼 제 첫 여행은 클로틸드 대표님과 함께이겠군요.”
여행을 가자는 말이 기분 나쁘지 않다니.
오히려…… 그 말을 듣고 조금은 두근거리지 않았나?
스스로 생각해도 무심한 편이었다. 아니, 냉정하다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
절대 남한테 신경 쓰는 타입이 아닌데 자꾸 세세한 부분까지 보게 된다.
멜라니를 배려하기 위해 꽃나무를 살펴보고 싶다며 내린 것도 자신답지 않은 일.
그리고…… 그 꽃잎을 떼 준 것 또한.
하지만 바람에 흩날리던 흰 꽃잎이, 해사한 미소를 짓고 있던 멜라니의 보조개에 내려앉은 순간.
숨을 쉬는 걸 잊어버린 기분.
세상이 느리게 흐르며, 세상에 멜라니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생각이 뒤이어 떠오르며.
저도 모르게 무심코 손이 뻗어졌다.
“네, 예쁘긴 하네요.”
“어머나. 방금 저보고 예쁘다는 줄 알고 설렜지 뭐예요?”
멜라니는 고맙다며 눈을 휘며 웃었다. 다행히 그의 행동을 크게 받아들인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미묘한 실망감 역시 느껴졌다.
어째서?
“오늘 이곳에 오길 참 잘했네요.”
하지만 피어오른 의문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어찌 됐든, 이 여자는 웃고 있고.
……자신도 웃고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 미소는 하루를 채 넘기지 못했다.
“멜라니!”
그토록 생기 넘치던 사람이 순식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그의 손이 멜라니의 보조개에 닿을 때와는 다른 감각으로, 세상이 느리게 흘렀다.
주변에서 떠드는 게 웅웅거리듯 들리고, 뛰어오는 클로틸드 공작의 모습은 현실감이 없었다.
모든 것이 질 나쁜 거짓말 같았다.
어떻게 보면, 멜라니 클로틸드는 불행한 인물일지도 모른다.
일견 공작 영애니까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 많은 걸 지켜봐야만 할 뿐 누리지 못하니까.
그녀는 얼마 살지 못한다.
자신에게는 분명 요정의 축복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라앉아만 있는 건 꼴사납지 않나.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는 거야.’
벨데르트 백작가에 나와 마탑에 갔던 그때처럼 말이다.
하여, 다미안은 멜라니를 돕기 위한 것을 만들기로 했다.
자신의 마력을 담아, 처음으로 누군가를 위해 만드는 마법 아티팩트.
정말 멜라니의 병이 마력에 반응을 보인다면, 마탑주씩이나 되는 자의 마력이 깃들었으니 큰 효과를 보일 터.
마법 아티팩트를 만드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그게 쉬웠다면 세상에는 마법 아티팩트가 넘쳐났을 것이다.
‘게이트도 어떻게 보면 마법 아티팩트야. 영상석도 그렇고. 그런 것에는 반응이 없다가 내 마력에만 반응한 거라면, 평범한 마력으로는 안 돼.’
다미안은 한동안 자신의 마력이 가진 성질과 가장 어울리는 금속을 고르고 또 골랐다.
마력의 양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지 실험했다.
하지만 다미안이 실력 있는 마법사라는 것과는 별개로, 아니, 오히려 실력 있는 마법사이기에 그의 마력을 금속에 담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몇 번이나 실패에 실패를 거듭했을까.
다른 마법사라면 몇 주는 걸렸을 과정을, 다미안은 빨리 아티팩트를 멜라니에게 가져다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해냈다.
“휴우.”
공작 영애쯤 되는 사람이 가지고 다니기에 마력석을 제외하면 너무 단순하기만 한 디자인이라는 게 걸렸지만.
‘일단 효용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야.’
이틀 밤을 꼬박 새워 가며 만든 팔찌 형태의 마법 아티팩트를 들고, 다미안은 공작저에 병문안을 갔다.
“……클로틸드 대표님.”
“어머, 바쁘신 몸이 와 주셨네요?”
전에 비해 부쩍 해쓱해진 얼굴인데, 멜라니는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평소처럼 웃었다.
고통에 익숙하다는 듯, 이런 일이 별것 아니라는 듯 구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미안이 이틀 밤을 새워서 피곤하다고 한들, 몸이 아픈 멜라니에 비할까.
자신이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색을 내는 게 미안할 정도로 힘들어 보여서, 다미안은 별다른 말 없이 가져온 팔찌를 별거 아닌 듯 건넸다.
“선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