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팔찌? 드디어 저를 약혼 상대로……”
“그건 아닙니다만.”
“어머, 좋다 말았네. 하지만 저와 약혼하고 싶다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저는 기다리고 있답니다.”
당신이 건강하기만 하면 약혼 같은 건 어렵지 않을지도.
다미안은 입 밖에 내려던 진심을 한숨과 함께 속으로 삼켰다.
그래서 멜라니가 팔찌를 매만지며 뺨을 붉힌 것도, 그 부끄러움을 들키지 않으려 약혼을 운운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고마워요, 마탑주님. 잘 끼고 다닐게요. 저 이런 거 처음 받아 봐요.”
폴리우스 자식은 약혼자였으면서 저런 선물을 한 번도 해 주지 않은 건가?
고작 팔찌 하나를 받았을 뿐인데 생경한 듯 굴다니.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소매를 걷으니 드러난 멜라니의 손목이었다.
안 본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전보다 마른 것 같은 게……
‘보라색 마력석을 고르긴 했는데.’
그나마 멜라니와 어울리는 마력석의 색을 고른 것만 마음에 들었다.
다미안은 조금 긴장한 채로, 자신이 건넨 팔찌를 착용하는 멜라니를 빤히 쳐다보았다.
“약혼의 의미는 아니지만, 제 마력을 담은 팔찌입니다. 혹시 통증이 줄어들지도 모릅니다.”
“…….”
“클로틸드 대표님?”
그런데 팔찌를 찬 멜라니의 표정이 이상했다.
“혹시 다시 어딘가 아픕니까? 아니면 팔찌를 차고 오히려 안 좋은 곳이 생겼다든가.”
다미안은 덜컥 놀라서 멜라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설마 또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사람을 부르려는데……
“마탑주님.”
다미안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멜라니가 아까보다 맑아진 목소리로,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통증이…… 사라졌어요. 꼭 요정의 축복을 받았을 때 같아요.”
멜라니는 다미안이 기대했던 그 부분을 콕 짚었다.
다미안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멜라니를 보았다.
그녀는 그만큼 개운한 기분이라며, 한결 밝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요. 한동안 진통제 없이 못 살았었는데. 고통 없는 세상이 이런 거였나?”
“물론 병이 나은 것은 아닙니다. 아가씨께서 아픈 양상은 비슷하세요. 하지만 아가씨의 말대로, 정말 고통을 많이 느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것참 희한하네. 왜 병이 나은 건 아닌데 아픈 게 덜해졌지?”
멜라니의 몸 상태를 확인하려고 부른 의사의 말대로 병이 다 나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진통제로 인한 부작용이 없고, 고통이 없어서인지 멜라니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아, 실은 점점 진통제 양을 늘리고 있었거든요. 이거 정말 대단하네요?”
멜라니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특히나 자신의 아버지에게는 더더욱.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소식을 좀 더 늦게 전하고 싶어요. 혹시나 일시적인 현상일 수도 있으니까요……”
멜라니가 아픈 것은 굉장히 오랜 기간이었다.
그동안 멜라니는 잠시 차도를 보였을 때도 있었고, 병이 다 낫는다는 희망을 가졌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만약을 위해 좀 더 확인하고 알리고 싶었다.
* * *
멜라니가 아파서 쓰러진 사이, 폴리우스는 다른 일로 바빴다.
간만에 <13번째 기사>가 어떻게 돌아가나 보려고 왔더니.
그 짧은 시간을 놓치지 않고 달려드는 배우 로비오 탐다제에게 붙잡힌 것이다.
“이십 년 전 장비로 대체 어떻게 찍으라는 겁니까. 품질을 떠나 사고가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지경이란 말입니까.”
“아니, 나도 하고는 싶다니까요.”
“조금만 기다리면 바꿔 주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그 부분의 일정을 다 미뤘는데……”
폴리우스는 지끈대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리고 눈앞의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말을 듣겠다는 성의가 보이지 않는 태도를 본 로비오의 목소리에 감정이 실렸다.
그나마 폴리우스가 상대해 주는 게 자신이라 총대를 메고 나섰는데, 폴리우스는 <13번째 기사> 영상석을 제대로 만들겠다는 성의가 없었다.
“영상석은 다 검은 달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요.”
“뭐요?”
“검은 달을 이기겠다고 돈으로 기사만 내면 뭐합니까. 요란하기만 하면 다 될 것 같습니까?”
제대로 된 연출가도 없고.
이미 극장 건물도 팔겠다고 내놓은 거라 장소를 빌려 가며 찍어야 한다.
공을 들여서 해도 모자랄 판국에, 폴리우스는 돌아가는 꼴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투자할 생각도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다 같이 망하……”
“시끄럽습니다!”
폴리우스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 질렀다.
갑작스러운 노성에 로비오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를 올려보았다.
“어이, 로비오 탐다제. 당신은 이미 계약서에서 서명했어. 시키는 대로 연기나 하라고. 투자는 이쪽의 몫이야.”
“하지만……”
“입 다물어, 평민 주제에!”
신분을 들먹이는 원색적인 욕. 로비오 탐다제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니……”
“장비에 쓸 돈이 없는 건 당신 출연료 때문이라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애초에 로비오 탐다제는 뜻깊은 일이라며 폴리우스가 낮게 책정한 출연료를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왜 처음부터 나를 캐스팅했습니까!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려고?”
폴리우스는 큰 보폭으로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뒤에서 로비오 탐다제가 하는 말을 애써 무시하면서.
“이럴 거면 <13번째 기사>는 모두의 추억 속에 남겨 두는 편이 좋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 말만은 폴리우스의 가슴 깊숙이 박혔다.
‘골치 아프게 진짜……’
사실…… 저자가 한 말이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알아서 더 그랬다.
로비오 탐다제를 비롯, 제작진들이 폴리우스에게 거세게 항의한 건 오늘 한 번이 아니었다.
여태까지는 멜라니가 자신이 검은 달의 공동 대표가 되겠다고 한 말을 받아들일 거라 생각해서, 설득이나 거절 없이 그저 나중에 해 주겠다며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멜라니에게 거절당하고, 약속한 날짜가 되자 더 미루기가 힘들어졌다.
돈을 받지 못한 제작진의 이탈, 그들의 자리를 채우느라 제대로 나가지 않는 진도, 부실해지는 품질……
‘돈이 부족한데 어쩌란 말이야.’
벨데르트 극단 사람들에게 다시 돌아오라 하고 싶었지만, 이미 멜라니가 데려간 상황.
사람을 구하는 것도, 제작비를 산정하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면 어느 부분에서 포기하고, 어느 부분에 투자해야 하는가?
제작비를 제대로 쓰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야 알 수 있는 거지?
여태까지 벨데르트 극단에서 데리고 있는 사람들이 능력이 있다는 걸 몰랐다.
연극이 아니라 영상석이라는 새로운 분야라서 더더욱 골치가 아팠다.
‘젠장, 멜라니는 대체 영상석 같은 걸 어떻게 만든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멜라니가 하는 거니까 쉬울 줄 알았는데.
폴리우스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제 머리를 헝클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래도 다행인 건, 급매로 내놓은 극단 건물이 팔렸다는 거였다.
‘휴, 드디어 돈이 생겼군.’
폴리우스는 매각하고 받은 돈을 세어 보았다.
건물 입지를 생각하면 턱없이 적은 돈인지라 조세핀은 내내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까지 급하게 팔 필요가……”
“폴리우스 님, 정말 멋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클라라가 그를 다잡아 주었다.
“평범한 사람이 고민하고 초조해할 때 결단을 내리는 사람이 거물이 될 수 있는 거죠!”
“하하, 그런가?”
“모두가 똑같은 판단을 내릴 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폴리우스 님인 거죠!”
폴리우스는 뿌듯함에 몇 번 헛기침을 했다.
벌써 자신이 큰 성공을 거두고, 자신과 파혼한 멜라니가 후회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폴리우스는 클라라의 말이 듣기 좋아서 넘어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자신은 현명한 선택을 한 거다.
‘조세핀이 멍청한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상단으로 성공을 거둔 클라라 쪽의 말이 믿음이 가는 건 사실이야.’
심지어 클라라는 자신이 아는 인맥을 이용해 영상석을 만들 마법사를 찾아 주기까지 했다.
“검은 달은 마탑이 주축으로 한 것이라, 기술을 빼 오기가 어려워요. 제국의 마법사들은 마탑이 하는 일에 손대는 것도 어려워하고요.”
“그럼 어떻게 하지?”
“……다행히 제가 외국의 마법사들을 알거든요.”
잠시 말을 고른 클라라는 더없이 선량하게 웃었다.
“제가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소개해 드릴게요. 걱정 말고 저만 믿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