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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47)화 (47/90)

<47화>

세간에는 명망 높은 후작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잉그다 후작가의 주 수입원은 풍요로운 영지에서 나오는 작물이었다.

하지만 요 몇 년 사이 가뭄이 들면서 영지의 사정이 어려워졌다.

“조세핀. 네가 혹시 가문에 한번 이야기해 보면 안 돼?”

“폴리우스야말로 벨데르트 백작님께는 도와 달라고 말 못 하나요?”

조세핀은 불안한 와중에도 성질을 누르며 나직하게 말했다.

애초에 본인이 실수하고서 오히려 자신에게 광산은 없느냐고 묻는 폴리우스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생각해 봐. 아버지께서는 다미안 놈이 뛰쳐나간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아들로 여기고 계신단 말이야! 내가 영상석 사업을 해야 돼서 돈을 빌려 달라고 하면, 왜 다미안과 동종 업계에 뛰어드냐고 하실 게 뻔해.”

맞는 말이었다. 조세핀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마르티스 영애는……”

“얼마 전부터 아버지가 시키신 일이 있다며 외국에 나가 있겠다고 했잖아. 지금은 연락을 못 해.”

“하필 이 시기에.”

마르티스 쪽에 돈을 빌린 것도 있고, 여태 클라라는 그들에게 도움만 주었지 직접적으로 투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여력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법사들에게 이미 돈을 선불로 줬잖아? 젠장, 이대로 마력석을 못 준다면 그 돈은 허공에 날아가!”

“그럼 내 지참금도, 폴리우스가 건물을 판 금액도……”

“그래, 이미 나는 아버지의 허락 없이 건물 판 것만으로도 선을 넘었어! 돈 빌려 달라는 소리를 하면 아예 후계자 자리는 넘기게 될지도 몰라!”

조세핀은 막막해졌다. 폴리우스는 추진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아무런 계획도 없이 그저 만용을 부린 거였다.

이쯤 되니 조세핀도 도저히 짜증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러게 왜 함부로 돈을 선불로 준 거예요? 아무리 위험 수당이니 뭐니 해도 말만 잘하면 나눠서 줄 수도 있었을 텐데!”

“뭐라고? 지금 이게 다 내 탓이라는 거야? 멜라니 클로틸드가 나한테 수작을 부렸는데 어떻게 해!”

“그게 무슨 수작이냐고요. 말해 봐요.”

“어……”

“그리고 그 수작에는 왜 당했는데요?”

폴리우스는 울컥 목소리를 높였다.

“상황이 이상했으면 너야말로 옆에서 말리지 그랬어!”

“마르티스 영애 말만 듣는데 내가 어떻게 그래요!”

그렇게 감정이 격해졌다.

상황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자, 폴리우스는 조세핀의 두 어깨를 잡더니 짓씹듯이 말했다.

“네가 잉그다 후작님께 말씀드려서 돈을 끌어오지 못한다면, 우리가 여태 투자한 돈은 다 공중에 사라지는 거라는 걸 명심해.”

“…….”

“조세핀, 또 클로틸드에게 지고 싶어?”

그놈의 클로틸드.

그놈의 멜라니.

조세핀이 아무런 말도 않고 가만히 있자, 폴리우스는 불안했는지 이번에는 위로하듯 말했다.

“우리에게는 <13번째 기사>가 있잖아! 그거 나오면 꼭 볼 거라고 사람들이 떠드는 거 몰라?”

“…….”

“어떻게든 영상석 출범 때까지만 버티면 돼! 그 <13번째 기사>가 벨데르트 가문의 것이라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결국 조세핀은 돈이나 대라는 소리다.

처음에 클로틸드의 약혼자를 빼앗았다는 성취감은 잠시뿐, 이제는 왜 멜라니가 이런 남자와 만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 어디가! 후작저에 가는 거야?”

“…….”

“조세핀 잉그다, 대답해!”

조세핀은 몸을 홱 돌렸다.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었는데 더 물러설 곳도 없었다.

어떻게든, 지금보다 더 나아지려면 영상석 사업으로 검은 달을 짓밟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폴리우스에게 돌아간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는, 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마부에게 말했다.

“잉그다 후작저로 가.”

“예, 아가씨.”

조세핀은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폴리우스가 지긋지긋했지만, 이미 그와 헤어지기에는 너무나 멀리 온 그녀였다.

“우리가 클로틸드보다 무엇이 부족하단 말이냐!”

“딸이 비실비실하니 곧 죽을 거라지? 어미를 닮았나? 하하, 그에 비해 우리 조세핀은 사교계의 꽃이 되었다 이 말이야!”

멜라니보다 뛰어난 성취를 거둘 때 무엇보다 기뻐하던 아버지.

폴리우스를 집으로 데려왔을 땐 바람을 피운 것을 문책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을 받았다.

‘그런 아버지라면……’

저택에 도착한 조세핀은 잉그다 후작의 서재에 들어가기 전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굳은 결심을 하고 들어갔다.

“갑자기 이 시간에 보자고 하다니 너답지 않구나.”

“아버지, 돈이 필요합니다.”

조세핀은 대뜸 말했다. 온갖 일이 한꺼번에 일어난 탓에 말을 빙빙 돌려서 할 기력이 없었다.

“돈이 필요하다니,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는 거냐?”

잉그다 후작은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조세핀은 쭉 말을 이었다.

“사실 영상석 사업에 제 지참금을 투자했는데……”

“너 결혼할 때 쓰라고 한 건데, 왜 그걸 건드려!”

“어차피 폴리우스와 결혼하면 그의 것이나 다름없으니 지금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뭐라고? 그걸 지금 말이라고…… 너희 아직 결혼은커녕, 정식 약혼한 사이도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하지만 어차피 멜라니와 헤어진 이상 폴리우스는 자신에게 올 게 자명한 수순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저와 폴리우스의 사이를 굳히기 위해서라도 더 사업적으로 진하게 얽혀야죠.”

“너는……”

“그래야 조세핀이, 나아가 잉그다가 클로틸드보다 더 나은 점이 있기에 폴리우스가 택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겠어요?”

조세핀은 아버지의 약한 부분을 건드렸다.

아니, 실은 자신의 약한 점이기도 했다. 잉그다 가문은 클로틸드 가문에게 내내 시달려 왔으니까.

“저는 잉그다가 더 매력적이고 훌륭한 여자라 클로틸드를 버리고 폴리우스가 저에게 온 거라고. 사람들이 인정하게 만들 거예요.”

“…….”

“아버지, 멜라니 클로틸드가 진출한 사업을 저희가 이길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클로틸드의 코를 납작하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예상대로였다. 클로틸드를 들먹이니 잉그다 후작의 표정이 바뀌었다.

“왜 그 돈이 필요한지, 자세히 말해 보거라.”

잉그다 후작 역시 선대로부터 너의 대에서는 클로틸드를 이겨야 한다고 누누이 들으며 자라온 인물이었다.

조세핀은 아버지의 앞에서 제 사업 계획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도와주세요. <13번째 기사>가 있으니 분명 잘될 거예요.”

조세핀의 말에 잉그다 후작이 침음을 삼켰다.

섣불리 사업에 뛰어든 건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참금까지 건드린 건 크게 혼나야 마땅한 일이지만…… 상태는 클로틸드였다.

‘그래, 다른 것도 아니고 <13번째 기사>가 있으니.’

잉그다 후작의 나이야말로 <13번째 기사>가 가장 애틋한 추억으로 남은 때였다.

그리고 자신의 또래가 가장 많은 돈을 쥐고 있는 세대라는 것을 떠올렸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일이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13번째 기사>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거겠지?”

“그럼요.”

잉그다 후작은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허락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물론이고, 나는 어려서부터 늘 클로틸드를 이겨야 한다고 배웠다.”

“…….”

“그러니 반드시 이기고 돌아오너라, 조세핀.”

잉그다 후작가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게 되었으니, 이제는 더더욱 돌이킬 곳이 없었다.

조세핀은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러니저러니 해도, 잠깐만 버티면 돼. 나도 바보는 아니야. 대출은 금방 갚을 수 있어.’

폴리우스가 사업이 성공할 거라고 늘 말하는 것처럼 조세핀도 자신이 있었다.

아버지가 준 돈으로 마력석만 구하면, 이 모든 게 순조롭게 풀릴 거라 말이다.

하지만 곧바로 난관에 봉착했다.

“시중에 마력석이 없다고요?”

원래도 시중에 풀리는 마력석의 수는 굉장히 적었다.

멜라니가 마력석으로 아티팩트를 만든 이후, 향후 마력석의 가치가 높아질 거라 여겨 지금 더 팔지 않으려는 것 역시 있었다.

시장에 있는 일부 마력석은 가격이 엄청 비쌌고 이전의 시세로 현재 구할 수 있는 마력석이 없었다.

“기존 가격의 열 배라면 구할 수 있긴 한데……”

“뭐라고요, 열 배?”

조세핀은 그 말에 기함했다.

“원래 마력석 가격도 비싼데, 그 열 배라고요?”

옆에서 그 말을 듣고 있던 폴리우스 역시 낙담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 이러면 오히려 손해를 보고 말 거야. 아무리 영상석이 인기라지만, 이 가격에 대체 누가 보겠어? 대여든 판매든 답이 없어.”

여태 사업을 진행하면서 절망한 순간들이 많았지만, 이번에는 정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물론 마력석이 심하게 비싸기는 해요. 두 분이 걱정하시는 것도 이해해요.”

보통 심하게 낙천적으로 일을 진행하는 폴리우스마저 처치자 클라라는 옆에서 끼어들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그럼 여태까지 두 분이 투자한 돈을 날리는 건 괜찮은가요?”

“그, 그건.”

“이미 영상석 기술 비용과 영상석 제작 비용으로 폴리우스가 극단 건물을 판 돈과, 잉그다 영애의 지참금이 들어갔어요.”

클라라는 초록색 눈을 빛냈다. 그리고 폴리우스가 절망스러워서 차마 마주하지 못했던 정곡을 찔렀다.

“폴리우스 님, 침착하세요. 지금 마력석을 구하지 못하면 그 돈을 허공에 날리는 것밖에 더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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