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51)화 (51/90)

<51화>

“그게……”

“아니, 이리 줘 봐. 그 서류 내놔 봐.”

폴리우스는 자신이 물어봐 놓고 직원의 손에 들린 서류를 빼앗아 들었다.

급한 마음으로 팔랑팔랑 넘긴 서류의 정체는……

“저작권 소송?”

“연극의 저작권이 극단을 소유한 벨데르트 가문뿐만 아니라 각본가와 연출가에게도 있다고……”

확실히 이번에 폴리우스가 만드는 <13번째 기사>는 예전에 했던 연극을 고스란히 답습할 예정이었다.

그래야 예전의 추억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워낙 대사며 연출이며 수십 년 전의 것인데도 훌륭했고 말이다.

“아아, 난 또 뭐라고. 됐어. 둘 다 평민이잖아?”

폴리우스는 휙 서류를 집어 던졌다. 긴장이 단번에 풀렸다.

“요즘 평민들이 아주 살 만한가 보네. 어디서 귀족한테 건방지게 소송질이야?”

평민인 직원 앞에서 폴리우스는 눈치도 보지 않고 말했다.

예전에는 주변을 배려하던 때도 있었지만, 그래서 이복형인 다미안의 무뚝뚝함과 비교가 되던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모두 집어치운 지 오래였다.

이제는 백작저의 하녀장 테라다 부인을 포함한 모두가 폴리우스에게 ‘착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폴리우스가 친절하고 다정하게 굴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그에게 여유가 있기 때문이었다.

멜라니가 떠난 이후, 그는 자기 자신을 챙기는 것만으로 바빴다.

“급한 일만 끝나면 자근자근 밟아 줘야지.”

상대는 폴리우스가 지금 붉은 해 출범으로 인해 정신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처음에는 극단을 해체시켜서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보니 이제라도 헤어지길 잘했네. 주인이었던 사람을 물고 있어. 감히.”

사실 저작권 문제를 폴리우스도 아예 모르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평민이고, 평민이 귀족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봤자 제대로 판결이 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래서 애초에 <13번째 기사> 연극을 올리면서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폴리우스가 신경 쓸 평민은 배우, 로비오 탐다제 말고는 없었다.

“이런 귀찮은 일은 나한테 보고하지 말고 알아서 처리해. 어? 내가 이런 일에 신경을 써야겠어?”

“죄, 죄송합니다.”

상대가 평민인데 소송이 제대로 걸릴 리 없었다. 어차피 조용히 있으면 지나갈 일이었다.

“재판도…… 어차피 영상석 사업이 출시된 이후에나 열리네?”

붉은 해가 출범한 이후에는 사람들이 <13번째 기사>에 열광할 테니, 소송이고 나발이고 폴리우스는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다.

“오늘따라 짜증 나게 구는 사람밖에 없어.”

그렇게 폴리우스는 소송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조세핀에게도 굳이 말할 필요 없는 일이었다.

* * *

소송을 걸었지만, 지금은 일을 크게 키울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걱정되겠지만, 저를 믿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나는 칠렌 연출가와 메이런 각본가를 달랬다.

‘어차피 재판은 붉은 해가 사업을 출범한 이후야.’

아직 재판이 열리는 것도 아닌데, 사업 전에 소송을 걸었다는 말이 나오면.

괜히 내가 <13번째 기사>에 겁을 먹어서 괜히 저작권 걸고넘어진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네, 대표님만 믿겠습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나만 믿는다는 의지를 보여 주었다. 덕분에 나도 지금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었다.

소송 건을 제외해도 지금은 해야 할 일이 아주 많았다.

[영상석 만드는 걸 달달 볶으면서 서두르라고 합니다만…… 정작 시장에 내놓을 영상석에는 별로 관심이 없더군요.]

이건 영상석을 만드는 마법사에게서 온 연락.

[폴리우스랑 잉그다 영애, 아직 서로 만나기는 하는데 좀 삐그덕거려요. 그래도 폴리우스를 아예 포기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

이건 마르티스 영애에게 받은 연락.

두 개를 본 결과, 조세핀은 아주 약이 바짝 오른 모양이었다.

‘흐음, 잉그다 영애도 샘플 몇 개만 대충 확인하고 끝내다니. 순진하다니까.’

본인들이야 연극을 몇 번이고 봤으니 내용 파악이 잘되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럴 거란 말이지.

그런 점까지 감안해서 정밀하게 영상석 확인을 거치고 몇 번이나 개량을 거쳐야 할 텐데.

역시 사업은 티를 낸다. 너무 안일하다.

마법사와 통역사 양쪽 다 내게 수배된 사람들이다 보니, 뭔 짓을 하든 그다지 걱정 없다.

나는 마르티스 영애가 보내는 연락을 마저 읽어 내려갔다.

[옆에서 둘이 싸우는 모습이 얼마나 재밌는지 몰라요.

그치만 속으로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팝콘 튀기는데 겉으로는 심각한 척 해야 돼서 힘들어요……]

폴리우스의 옆에서 이상한 조언을 하고, 조세핀과의 사이를 나쁘게 만든다.

마르티스 영애는 스파이 노릇을 굉장히 잘해 주고 있었다.

‘서로 싸워 대니 소통이 제대로 안 될 거고, 영상석 사업 퀄리티도 낮아지겠네. 한마음 한뜻으로 움직여도 모자랄 판에.’

어쨌든 잉그다 영애가 폴리우스를 포기하지 않았다니, 이번 연회에서 뭔가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다미안 마탑주와 확실히 약혼하기 전까지 사교 모임을 되도록 나가지 않으려던 나였지만, 그래도 한계가 있었다.

내가 일단은 귀족 영애인 걸 어떡해.

오늘은 성인이 된 미혼 귀족들은 전부 모이는 세라피나 축제였다.

전쟁통에서 고단한 연인의 사랑을 축복하던 성녀의 기일이었는데, 오늘 참석하지 않는다면 ‘나는 부족함이 많아 결혼하지 못하는 얼뜨기’라고 떠드는 셈이 된다.

‘결혼이 왜 필수인지 모르겠네. 하여간 귀족들이란.’

그래도 다미안 마탑주와 꽤 친해진지라 파트너로는 함께 참석할 수 있어서, 폴리우스를 만난다고 해도 별걱정은 안 됐다.

그런데…… 막상 연회에 참석하니 폴리우스고 뭐고 다른 남자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미혼 귀족이 모이는 축제다 보니 새로운 연인들이 많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날 맺어진 사람들은 오래오래 운명을 같이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말이다.

평소 귀족들의 연회는 우아하고 기품이 강조되는 분위기라면, 오늘 세라피나 축제는 다소 경쾌하고 가벼운 분위기였다.

아무래도 갓 성인이 된 젊은 남녀들이 모이는 자리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제 짝을 찾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모를 일이다.

“어머, 그럼 드디어 오늘 고백하는 건가요?”

“하지만 고백은 무섭기도 하고.”

“그러지 말아요.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언제 또 용기를 내겠어요?”

서로를 힐끔거리는 시선이 교차하고,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여럿 보인다.

평소라면 기분 나쁠지 모를 수군거림도 설렘으로 다가오는, 폭신폭신한 분위기.

다만…… 나한테는 이런 공기가 썩 반갑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말이야, 이건 좀 심하지 않아?

“클로틸드 영애,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천사도 영애를 보면 고개를 숙일 겁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아서 우뚝 그 자리에 굳었다.

‘그냥 천사도 아니고, 무슨 천사……? 내가 잘못 들었나?’

심지어 그 말을 한 영식은 나와 인사도 해 보지 않은 상대였다.

연회의 분위기가 생각보다 노골적이었다. 부담스러워서 미치겠다.

‘내가 건강하지 못한 것만 빼면 일등 신붓감이긴 하지. 아니, 어떤 사람은 건강하지 못하니까 더 좋아할지도.’

폴리우스와 헤어진 건 맞는데, 다미안 마탑주와 약혼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지금 이 순간이 기회라고 생각한 영식 몇몇이 나에게 노골적으로 치대기 시작한 거다.

“클로틸드 영애, 영상석 굉장히 재밌게 봤습니다.”

“아, 감사……”

“홈시어터라는 것도 굉장히 신기하더군요. 혹시 공작저에 초청해 주실 수는 없나요?”

“그럼 저도……”

“아니, 다른 영식들은 말고, 저와 단둘이서만 말입니다.”

“영식이 뭔데 클로틸드 영애와 둘이서 보겠다고 하는 겁니까?”

아, 엄청 시끄럽다.

그리고 이런 판을 꾸민 사람이 누군지 대충 감이 온다.

나는 힐긋 잉그다 영애가 있는 쪽에 시선을 주었다.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리던 영애가, 오늘 본의 아니게 내가 중심이 되었는데도 느긋하게 바라보고 있다.

‘클로틸드 영애랑 결혼한 사람이 차기 공작이 아니겠느냐고 꼬드겼겠지 뭐.’

이렇게까지 많은 영식들이 자신감을 얻고 돌진하는 게, 꼭 누가 부추겨서 그런 것 같거든.

‘아, 이런 기분은 오랜만인데.’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내가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공작이 되는 계단 같다고.

폴리우스와 약혼하기 전에는 항상 느꼈었던 기분인데……

최근에는 내가 참, 다미안 마탑주 옆에 있으면서 물러지긴 물러진 모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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