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 *
그리고 조세핀과는 다르게,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멜라니를 보며 폴리우스의 기분은 무척이나 저조했다.
영식들이 멜라니에게 하는 말이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저는 바람은 안 피웁니다.”
“솔직히 벨데르트 영식, 그러니까 폴리우스 벨데르트 영식보다는 제가……”
사실 다미안 마탑주는 비비기 힘들었다.
능력도 그랬고, 그의 성품 역시 감히 건드리기 힘든 감이 있었다.
조세핀이 부추긴 것도 있었지만, 공작 영애에게 이렇게 쉽게 말을 거는 건 모두 전 약혼자가 폴리우스라는 데에서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그래도 폴리우스 벨데르트보다는 내가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을, 여기에 있는 영식들이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 백작 부인 밀어낸 어머니 닮아서 얼굴은 꽤 괜찮긴 하지만…… 그것 빼고 뭐가 있지? 요정의 축복?’
‘예민하다고는 하지만, 비위 잠깐만 맞추면 차기 공작 아니야?’
한편 멜라니는 영식들의 속내가 훤히 보여서 혀를 찼다.
‘내가 눈이 낮은 게 아니라, 폴리우스를 진통제로 봐서 그런 거라니까……’
하지만 이게 다 자신의 업보였다.
그리고 영식들에게 둘러싸인 멜라니가 생각한 대로, 이 판은 조세핀이 부추긴 게 맞았다.
“마탑주님이 약혼하자고 딱 사이를 못 박지 않고, 폴리우스 님과는 헤어지니 굉장히 외로워 보이더라고요.”
“밀라 부인과 함께 제가 나들이를 하다 인사했는데, 굉장히 부러운 얼굴로 저를 보는 걸 느꼈어요.”
물론 하는 말마다 제대로 된 말이 아니었다.
밀라 부인과 만났을 때 마탑주와 함께 있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밀라 부인과 조세핀 자신이 당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하도록 조세핀은 교묘하게 판을 짰다.
영식들더러 멜라니를 공격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강력하게 구애하라고 한 것뿐이니까.
‘으, 저게 뭐 하는 짓이야?’
그리고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클라라는 조세핀이 웃고 있는 것을 보고 오만상을 썼다.
그 순간, 멜라니가 이쪽을 향해 눈짓을 했다. 대충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좋아, 폴리우스에게 가서 말해야겠다.’
클라라는 호다닥 폴리우스에게 달려가 가련한 시늉을 하며 말했다.
“저는 정정당당하게 폴리우스의 마음을 얻고 싶은데, 잉그다 영애는 사교계를 조종해서 폴리우스를 얻으려고 하는 거라니까요? 정말 간악해요!”
사실 폴리우스는 마력석 광산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그렇게 멜라니에게 내쳐졌는데도, 아직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마력석이 부족한 일들을 겪으면서, 만약 멜라니와 자신이 약혼한 상태였다면 얼마나 사업하기 편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든 것이다.
‘그때 조세핀이 괜히 편한 자세로 축복을 달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멜라니가 아직까지 내 약혼녀지 않았을까?’
침대에 조세핀을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아내로는 멜라니가 나았다. 그런 생각에 심란했다.
‘아니, 내가 굳이 사업을 할 필요도 없었지. 멜라니가 한 영상석 사업도 다 내 것이었을 거 아니야.’
멜라니의 말에 여러 번 화가 나기도 하고 사업을 잘해서 둘의 콧대를 눌러 주겠다고도 생각했다.
거기에 옆에서 클라라가 계속해서 극단 사람들을 받아 준 걸 보면 미련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고, 다미안 마탑주와 약혼하겠다 못 박은 게 아니냐고 하니 더더욱 흔들렸다.
‘혹시 다미안에게 간 건 내 질투 유발 작전이 아니었을까…… 지금이라면 그냥 멜라니를 받아 줄 수 있는데.’
그런 마당에 멜라니가 다른 영식들에게 구애받는 게, 조세핀의 짓이라니 분노가 치솟았다.
이 모든 게 다 조세핀 때문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잔뜩 자극받아 있었는데 말이다.
“허허, 벨데르트 백작님. 아드님이 정말 부럽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이쪽에 계신 폴리우스 영식 말고, 마탑주이신 다미안 영식 말입니다.”
영상석 사업이 잘되자, 하나같이 아버지에게 가서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예전에는 저 칭찬들이 다 내 것이었는데.’
다미안은 마탑주긴 하지만 사교계에 오르내릴 말이 별로 없었다.
마탑은 그저 동떨어진 구역이라고 할까. 무력이 필요한 때 이외에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으니까.
마물이 쳐들어온 것도 아닌데, 다미안이 이렇게 주목받게 된 건 다 멜라니와 함께한 뒤였다.
“허허, 그 아이가 어려서부터 마법에 재능이 있긴 했습니다. 제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똘똘하기도 했고요.”
그리고 다미안이 뛰쳐나간 뒤로 그 자식 이름만 나오면 심기가 불편하다는 티를 내던 아버지는, 자식을 잘 키웠다며 밀려오는 칭찬에 기뻐하고 있었다.
언제는 집에 돌아와도 받아 주지 않겠다더니, 이제와 소중한 아들인 양 구는 건 뭔가.
“네 멋대로 건물을 팔고 극단을 해체시켜? 벨데르트 백작가에서 극단을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는지 네가 알기나 해?”
“영상석 사업을 하겠다고? 사업이 장난이야? 철저한 준비 없이 건물도 제값에 못 받는 녀석이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다미안은 네 형제다. 형제가 있는 업계에 뛰어들다니 말이 돼?”
다미안은 벨데르트 가문이 싫다며 뛰쳐나간 지 오래인데.
아버지의 아들은 이제 자신뿐인데, 왜 그걸 모르는 걸까.
자신을 응원해 주기는커녕 질책만 하던 아버지는 제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젊은 사람들만 모이는 연회에 다미안과 만나기 위해서 굳이 참석하시다니. 대체 왜 이러시는 거야.’
미혼 남녀만 모이는 축제에 기혼자가 참가하는 일은 극히 드문데, 이번에 다미안이 급부상하자 백작은 다미안이 올 것 같으니 사람들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고 참석했다.
지금도 속이 터지는데, 아버지가 다미안을 보며 웃는다면 더 화가 날 것 같았다.
‘설마 후계자 자리를 다미안에게 주겠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백작가 따위 신물 난다고 집 나간 놈인데?’
벨데르트 백작의 옆에서, 폴리우스는 조금도 주목받지 못했다. 벽에 붙어 있는 장식물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아드님을 소개해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좋은 사업이 있어서 말인데……”
“아아,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급하게 갈 곳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벨데르트 백작은 오늘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야 하는 처지였다.
오늘의 연회는 다미안이 아니면 참석할 생각을 하지 않았던 지라, 이미 뺄 수 없는 일정이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군요. 오늘 마탑주님이 오신 것 같은데 보이지가 않아서……”
그렇지만 이제 아버지가 사라지면 이 굴욕도 곧 끝나겠지.
기껏 벨데르트 백작이 연회장까지 방문했지만, 그를 보기 싫은 건지 다미안은 연회장에 꽁꽁 잘도 숨어 보이지가 않았다.
“폴리우스!”
폴리우스가 그렇게 이를 악물고 있었는데, 클라라가 달려온 거였다.
“이러다가 클로틸드 영애가 저 영식들 중 하나와 눈이 맞으면 어쩌죠?”
“아니, 클로틸드 공작가에서 받은 청혼서가 아직도 건재한데 접근하는 영식들이 있다고?”
옆에서 클라라의 이야기를 들은 벨데르트 백작의 눈빛이 불타올랐다.
“폴리우스, 나는 지금 연회장을 떠야 하니 얼른 가서 영식들에게 청혼서를 받은 게 어디인지 말해 주거라!”
“네, 아버지!”
벨데르트 백작이 무슨 의도로 말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폴리우스는 그의 말을 듣자마자 바로 자리를 박찼다.
그래, 아직 청혼서가 있다.
가문 간 오가는 혼담은 대상을 정해져서 보내는 것이 아니다.
아직 멜라니를 붙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다미안과 약혼을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자신을 그렇게 좋아했는데, 한 번만 자존심을 굽히면 달라지지 않을까.
영식들 앞에서 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 마음을 돌리지 않을까.
‘극단 사람들까지 영입한 걸 보면, 내가 싫다고 말하긴 해도 아직 나한테 마음이 남은 거 아니냐고!’
폴리우스는 서둘러 멜라니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조세핀 역시 함께 있었다.
“클로틸드 영애, 혼자라 외로워 보이는데 어떤 영식이든 내민 손을 받아 주지 그래요?”
조세핀이 기회를 노리다, 멜라니를 비웃을 준비를 하고 온 거였다.
“저번에 제가 밀라 부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퍽 부러워했던 것 같아서요. 그때 굉장히 쓸쓸해 보였거든요.”
폴리우스는 대체 조세핀이 왜 자신을 끝까지 방해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조세핀을 끝까지 어장 관리 한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여러분,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폴리우스?”
조세핀이 이쪽을 바라보았지만, 폴리우스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 말했다.
“클로틸드 공작가에서 저희 가문에 보낸 청혼서는 아직도 곱게 보관되어 있습니다. 왜 임자 있는 여자에게 이러시는 겁니까?”
폴리우스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악당에게 붙잡힐 위기에 빠진, 멜라니를 구하는 영웅.
하지만 그렇게 자신이 극적으로 등장했다고 생각한 순간.
평생 듣기 싫어하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왜 벨데르트 백작가와 혼담이 오가는 사람에게 이런 짓을 하는 겁니까?”
폴리우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 자리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싫어해 왔던, 그의 이복형제가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