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의 어장에서 탈출하겠습니다 (53)화 (53/90)

<53화>

“클로틸드 영애, 이런 자리에서 분위기 없게 말하고 싶지 않았지만. 제가 영애의 옆에 설 자격을 주시겠습니까?”

다미안 벨데르트.

태어나면서부터 맞닥뜨린, 그의 주적은 샹들리에 아래에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지금…… 여기서 다미안이 나온다고?

그 어느 때보다 말쑥한 제복 차림.

자신이 봐도 이 웅장하고 화려한 연회장에서 더없이 잘 어울리는 귀족적인 모습으로.

그는 떼거지 같은 귀족 놈들이 사이를 헤치고 꼿꼿하고 우아하게.

마침내 폴리우스까지 쉽게 지나쳐 멜라니에게로 다가갔다.

다미안의 등장에, 자신의 구원을 기다리는 듯하던 멜라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녀의 뺨에 화색이 돌았다.

“마탑주님?”

“혼담이 오간다고 해도 부담스러울 수 있는 거 압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영애에게 정식으로 약혼자가 될 자격을 달라고 말하는 겁니다.”

흡사 동화 속의 한 장면.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낮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하지만 폴리우스는 그럴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벌려진 입에서는 가쁜 숨만이 나왔다.

“허억……”

정신이 아득해졌다. 가장 안락하다고 믿었던 쉼터에서 맹수를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고,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깊은 무력감.

하지만 이 순간, 다미안은 멜라니의 앞에서 주인공처럼 빛나고 있었다.

단언컨대 살면서 가장 끔찍한 순간이었다.

* * *

다미안은 조세핀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클로틸드 영애가 외롭지는 않았을 겁니다, 옆에 제가 있었으니까.”

“마, 마탑주님? 왜 여기에……”

“제가 그 자리에서 말했었죠. 상간녀라 지능이 낮나 보다고. 영애도 약혼녀가 있던 시절에 폴리우스에게 추근거렸다더니 비슷한가 봅니다.”

조세핀은 휘청이며 뒷걸음질을 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다미안은 신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머리가 없습니까? 하긴, 누구는 진즉에 쓰레기인 걸 알고 버린 걸 주워 먹는 걸 보니 그래 보이는군요. 역시 저 자식에게서 탈출하는 것도 지능 순서대로예요.”

폴리우스가 씨근덕거리며 소리를 꽥 질렀다.

“다미안,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우리 어머니더러, 그리고 조세핀더러 지금……”

“너야말로 빠져. 파혼당한 주제에 더 머저리처럼 굴지 말고.”

다미안은 거침없던 태도와는 다르게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멜라니에게 다가갔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다미안이 상대를 세심하게 신경 쓰고,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반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옆자리에 서 달라 말하게 되어서 미안합니다.”

“괜찮아요. 저는…… 마탑주님만 있으면 괜찮아요.”

멜라니는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주변을 보며 말했다.

“들으셨죠? 제 약혼자께서 심기가 불편하신 듯하네요.”

“크, 크흠.”

영식들이 멜라니에게서 물러났다. 폴리우스는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이러면 내가 뭐가 돼?’

폴리우스는 더듬거리며 애써 사태를 수습했다.

“그, 그래. 나는 다미안의 형제로서, 이 사태를 수습하려고 한 겁니다. 저는 메, 멜라니가…… 행복하길 바라고요. 하하.”

멜라니는 자신에게 미련이 있던 거 아닌가? 왜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다미안만 보고 있는 거지?

왜 나를 떠나는 거야?

폴리우스는 혼란스러웠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이 순간이 꿈이길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차가워서, 믿고 싶지 않은 지금이 눈을 떴다 감으면 사라지지는 않았다.

폴리우스는 애써 좋은 사람인 척 웃었다. 하지만 반대로 속은 썩어 들어갔다.

그런 그를 사람들은 전혀 도와주지 않고 흥미롭다는 듯 질문을 퍼부었다.

“폴리우스 벨데르트 영식, 클로틸드 영애가 행복하길 바란다는 말이 사실입니까?”

“저번에 클로틸드 영애가 마탑주님과 같이 있을 때는 화내지 않았던가요?”

멜라니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그저 폴리우스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예전에 폴리우스가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던 멜라니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젠장, 다미안 저놈만 없었어도 멜라니는 지금 내 옆에 있었을 텐데!’

이를 악문 폴리우스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자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을 축복한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나, 나에게도 사랑하는 조세핀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하하하!”

물론 멜라니를 붙잡을 듯 와 놓고서 갑자기 조세핀을 내세우는 게 신빙성 있을 리 없었다.

폴리우스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뻔하다고 해도, 어떻게든 체면치레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

그리고 그의 말에 사람들의 이목이 조세핀에게 쏠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후작가의 영애고,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던 그녀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그녀는 멜라니 클로틸드의 대체품이었다.

그것도 자신이 좋다고 쫓아다니던 남자의 입으로.

‘왜 저런 취급을 당하며 폴리우스 영식과 약혼하는 거지? 그래 봤자 사생아라 신분이 낮은 것도 있잖아.’

‘클로틸드 영애를 싫어하더니, 저렇게라도 이기고 싶은 건가?’

조세핀은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아도, 자신을 보며 다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폴리우스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사람들 앞에서 말했는데도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굴욕감만이 밀려왔다.

“어머……”

“그럼 잉그다 영애가 폴리우스 영식과 약혼하는 건가?”

그 말을 폴리우스도 들은 건지 냉큼 대답했다.

“맞아요. 우리도 약혼하기로 했습니다. 그렇지, 조세핀?”

“…….”

아까 전 다미안이 멜라니에게 했듯이 낭만적이라는 감탄사는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에 조세핀의 얼굴이 잔뜩 달아올랐다. 결코 약혼으로 인한 기쁨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모두의 부러움을 받으면서, 특히 저 망할 클로틸드의 질투를 받으면서 폴리우스에게 청혼받아야 하는데!’

처음 폴리우스와 친밀한 사이가 되었을 때의 희열. 그때 했던 달콤한 상상에는 지금 같은 꼴이 전혀 없었다.

‘왜 이 내가 먹다 버린 걸 주워 먹는 꼴이 된 거야! 나는 빼앗으면 빼앗았지. 이런 건……!’

멜라니를 자극해서 그녀의 약혼 상대가 정해지게 하려고는 했다.

클라라 마르티스가 옆에서 헛소리를 하긴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가 폴리우스에게 마음이 떠난 것은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멜라니가 버린 폴리우스를 자신이 주워 먹는 듯한 상황이 될 줄은!

“약혼하는 분들이 두 쌍이나……”

“그런데……”

말을 끝까지 잇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약혼 따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그녀 역시 너무 멀리 왔다.

조세핀은 이를 아드득 깨물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저는…… 폴리우스와 결혼할 거예요.”

어차피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사업도 폴리우스와 함께하는 처지.

조세핀은 최대한 당당한 표정을 하려 애썼다.

‘그래도 적어도 이 순간, 클라라 마르티스는 나를 부러워하고 있을 거야.’

자신이 폴리우스와 둘이 있으려고 하면 얼마나 득달같이 달려와 방해했던가.

요즘 굉장히 얄밉게 굴더라니, 자신이 폴리우스와 약혼한 걸 보면 얼마나 속이 타들어 갈까!

‘우와, 마탑주님 뭐지? 클로틸드 영애한테 진짜 관심 있는 건가? 클로틸드 영애는 합의하에 약혼한다는 느낌으로 말했는데 그게 아닌 건가?’

하지만 클라라는 멜라니와 다미안을 보고 있다가.

‘아, 잉그다 영애랑 폴리우스 이제야 약혼했나? 그런데 엄청 비교된다. 꼴사나워!’

조세핀을 보며 히죽히죽 웃는 것을 겨우 숨기고 있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날은……

“하하, 우리 모두 서로의 사랑을 찾았으니 축복해 주십시오!”

폴리우스는 애써 목소리를 끌어 올려 분위기를 수습하려 시도했다. 그런 식으로 자존심을 어떻게든 회복하려는 모양새를 취한 것이다.

이미 두 사람은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 따위 떠난 지 오래였지만 말이다.

“약혼 축하드립니다!”

“행복하세요!”

물론, 이 자리에서 폴리우스의 바람대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말이다.

* * *

그리고 일견 화기애애한 듯 보였던 폴리우스와 조세핀은, 사람들이 사라지자 돌변했다.

“조세핀, 왜 멜라니한테 영식들을 붙인 거야? 어머니랑 같이 만났다는 건 또……”

“꼭 제가 무구한 클로틸드 영애를 괴롭혔고, 그걸 힐난했다는 것처럼 말하네요?”

조세핀은 폴리우스의 태도를 보며 코웃음 쳤다.

“예전에는 클로틸드 영애가 자신에게 한 말과 행동을 이르면서 저만이 폴리우스의 편인 듯 굴었잖아요.”

“조세핀…… 난 너밖에 없어. 너까지 내게 등 돌리면 난…… 죽어 버릴지도 몰라……”

폴리우스는 예전에 했던 말을 떠올렸는지 얼굴이 확 굳어졌다.

조세핀은 그 모습을 보며 빈정거렸다.

“그때랑은 다르게 클로틸드 영애가 당신 없어도 잘나가는 것 같으니까 기분이 색다른가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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